박완서 선생의 마지막 소설집이란다. 한국 문학의 대모, 소설의 고향, 칭찬은 차고도 넘치니 여기서는 소설집에 실린 몇몇 문장들을 소개할까 한다.
“정욕과 물욕이 비기고 텅 비는 걸 느꼈죠.”(2009년작 <빨갱이 바이러스>) 느지막이 남편을 떠나보낸 뒤, 큰손자의 젊은 영어선생에게 끌리는 여자. 그녀는 장례식장에서조차 저를 달래는 영어선생의 손길을 즐긴다. 60대 중반에 다시 찾아온 욕정. 하지만 영어선생이 사업자금을 빌려달라고 하자, 욕정은 순식간에 수그러지고 현실로 컴백한다.
“80년대 대학 들어간 애가 세상이야 어찌 돌아가든 알 바 아니라는 듯이 공부만 팠다는 건, 제 보기에는 인간성이 의심스러워요.”(1993년작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내 아들은 80년에 대학생되어 데모하다 그만 죽고 말았다. 그런데 형님 아들은 무사히 대학 졸업하고 취직도 잘했다. 나는 형님 앞에서 인간성 운운하며 죽은 아들을 치켜세운다. 부모답게 허영심을 채우고픈 욕심, 자식 잃은 슬픔.
“어머니는 오빠가 평생 사회에 참여해서 돈 한푼 벌어들인 일이 없는 주제에 까닭없이 죽어야 하는 일엔 끼어들고 말았다는 사실이 문과 출신이라는 것과 반드시 무슨 상관이 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1975년작 <카메라와 워커>) 어머니는 손자 훈이 문과로 가면 안된다고 고집 부린다. 아들이 이념문제에 휩쓸리는 바람에 죽었다 믿는다. 그렇게 훈은 이과로 가지만 취직하지 못하고 빌빌대다 고속도로 건설현장에서 썩어간다는 아이러니한 결말.
밑줄 친 문장을 좀더 써본다. 속물 냄새 풀풀 나는 문장, “기죽을 거 없다, 우린 땅부자야, 땅부자.” 우리 사회에 뿌리내린 보수성을 건드리는 문장, “훈이를 이 땅에 뿌리내리기 쉬운 가장 무난한 품종으로 키우는 데까지 신경을 써가며 키웠다”. 지금도 무난한 품종으로 키워지는 수많은 얼굴들이 있으니 밑줄 치지 않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