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바조를 본뜬 빅 뮤니츠의 <나르키소스>, 2005년.
페이스북 친구 5만 돌파를 기념해 과감히 제 누드를 스스로 공개한 대만 여배우 딩궈린은 예외적인 사건에 속한다. 흔히 세상을 발칵 뒤집는 유명인사 알몸 사진이 공중에 제시되는 경로는 ‘유출’을 통해서다. 잊힐 법하면 유출 사고가 터진다는 건 은폐된 자촬(자기촬영) 누드의 양이 드러난 것 이상임을 뜻할 테다. 해커 소행으로 추정된 스칼렛 요한슨과 리한나의 자촬 나체는 그들을 곤경에 빠뜨렸다. 이에 앞서 킴 카다시안과 패리스 힐튼은 자기 연인과 나눈 정사 동영상이 세상에 폭넓게 전달됐다. 타미 리와 파멜라 앤더슨의 정사 비디오가 유통된 1995년은 은밀한 사생활 유출의 시원쯤 될 거다. 한때 전문가의 전유물로 간주된 재생도구의 사해평등적 보급이 빚은 예상된 소동이었다. 제 알몸과 정사장면을 촬영하는 동력인 자기애와, 섹스비디오 유출의 원조 파멜라 앤더슨이 겪는다는 ‘거울 공포증’(거울 쳐다보길 두려워하는 증상)은 역설이고 해명 불가다. 못 말리는 과잉 자기애로 망가진 남성도 드물게 뉴스를 탄다. 뉴욕시 하원의원 앤서니 와이너는 벗은 상체와 속옷 차림 하체 사진을 트위터로 소녀들에게 발송하다 들통나 사죄 기자회견까지 열어야 했다.
하지만 여기까진 그저 서곡에 불과하다. 단지 셀레브리티의 알몸 사진이라는 ‘한정된 자원’을 맛봤을 뿐. 방대한 매장량의 본진은 공개 혹은 비공개된 무명인 누드/정사의 자촬 사진과 동영상이다. 털기만 하면 이름도 성도 출신도 알 수 없는 알몸이 서슴없이 우수수 떨어진다. 당사자가 자청해서 찍은! 무수한 무명 나르키소스들이여!
이 현대적 현상이 신화 속 나르키소스를 연상시키는 이유다. 갖은 애를 먹은 선례를 무수히 지켜봤지만, 끝내 자기애에 이끌려 알몸을 촬영하는 이 준(準)대중적 현상은, 우물에 비친 제 모습에 흠씬 빠져 기어이 죽고 만 나르키소스의 결론부와 닮았다.
일반인이 비영리로 촬영한 셀프 누드나 정사사진/영상은 한마디로 방대한 바다다. 전문 외설 사이트들이 메뉴에 ‘아마추어’ 코너를 신설해야 할 정도로. 비공개를 원칙으로 촬영된 목적없는 합목적적 알몸은 선명한 목적을 지향하는 공개 외설업이 감사히 인수한다. 사생활에 관한 이율배반적 지침 둘(비밀과 공개)을 동시에 지향하기에 온라인 대중을 퍼블리즌이라 칭하나보다. 자촬 여성 알몸 사진이 공개되는 경위는 자랑삼아 남친에게 비밀리에 전송한 알몸을 ‘남성의 보편적 과시욕’이 공유로 연결했을 소지가 크다. 거부감 없이 촬영된 알몸과 정사장면의 딜레마는 여성의 자기애 또는 내밀한 정사의 최대 소비자가 불특정 남성이란 진실에서 기인한다. O양, A양 등 숱한 ‘양들의 전쟁’이 이어지는 건 허영심과 관음 욕구로 뭉친 남성 연대 때문이다. 사생활의 결정적인 순간을 기록 저장하려는 집단 무의식의 기원은 내세를 믿었던 고대적 전통일까? 자기 박제화의 욕구가 점잖게 승계된 게 초상화 전통인지도 모른다. 자기애의 전통은 굵고 길다. 신화 속 나르키소스와 그 현대적 계승자들이 자기애로 곤욕을 숱하게 치르고도 학습효과가 없는 걸로 봐선. 재생도구를 쥔 인류는 ‘본능의 실체’를 응시하려는 성향도 높아진다. 지구촌 도처의 컴퓨터 하드디스크의 총합은 알몸 파일이 상상을 초월할 만큼 매장된, 자기애의 보고(寶庫)일 게 명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