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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객잔] 시네마의 본성에 말걸기

데이비드 핀처의 <밀레니엄: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과 이미지의 스토리텔링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두편의 <밀레니엄> 영화를 보았다. 스티그 라르손의 원작 소설은 읽지 않았다. 저명한 원작 소설에 기댄 영화들이 숙명처럼 겪게 되는 원작과의 비교는 한 영화의 가치를 논하는 데 그다지 득이 될 게 없다고 생각한다. 소설은 소설이고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 영화가 소설에 미치지 못한다거나 창조적으로 그것을 재해석했다는 말들은 죄 무익한데, 그러한 평가들이 소설이나 영화의 가치를 어떤 식으로든 변경시키지 않는 까닭이다. 데이비드 핀처가 연출한 미국 버전 <밀레니엄: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이하 <밀레니엄>)이 내게는 스웨덴 버전보다 훨씬 흥미로웠다. 이 영화에는 핀처의 저작이라는 흔적이 곳곳에 있을뿐더러 무엇보다 시네마틱한 아이디어가 넘쳐난다. 성서적 해석과 연관된 연쇄살인을 소재로 삼은 것이나 저널리스트의 직업윤리(<조디악>에 이어 기자가 탐사의 주체가 된다)에 따른 미제사건에 대한 탐사라는 점에서 영화는 <쎄븐>과 <조디악>의 유산을 계승하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조디악>이 여전히 해결을 미제로 남겨둔 반면, <밀레니엄>은 산뜻하게 봉합하고 다음 주제로 넘어간다는 것. 더 근원적인 차이는 <밀레니엄>이 영화 이미지의 본질에 대해 경청할 만한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사실이다. 핀처의 연쇄살인 드라마는 가시적인 영역의 바깥에 잠복해 있는 익명적이고 비가시적인 테러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많다. 이는 <쎄븐>과 <파이트 클럽> <패닉 룸> <조디악>을 공통으로 감싸고 있는 유령과 같은 공기와 잠재적인 폭력의 기운에서 줄기차게 확인되어온 바이다. 폭력과 테러의 진앙지로서의 보이지 않는 영역에 대한 탐사는 핀처의 고유한 주제인데, <밀레니엄>에서 그것은 ‘이미지의 스토리텔링’이라는 텍스트의 전략과 절묘하게 결합한다.

시네마틱 이미지의 작동방식에 대한 영화

<밀레니엄>이 스릴러 장르의 서사로서 균형감각을 상실하고 있다는 지적은 설득력이 있다. 극의 중반 지점까지 리스베트(루니 마라)의 어둡고 불우한 일상사가 드라마의 한축이 되는 것도 서사의 통일성과 효율성이라는 측면에서 흠결로 비판받을 수 있다. 리스베트가 속악한 법정 후견인에게 복수하며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까지 미카엘과 리스베트는 그들 각자의 스토리를 가지고 합쳐지지 않는다. 머리와 몸통이 따로 노는 인간처럼 유기적이지 못한 두 인물의 스토리에서는 변호사나 기업가 등 스웨덴을 이끌어가는 지도층 인사들이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부패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 외에는 공통점이 없다. 그러나 핀처의 관심은 복지왕국으로 불리는 스웨덴의 법정 후견인들이 보호보다 강간을 일삼는 변태들이며, 한때 스웨덴을 호령했던 거대 기업은 나치의 잔당이었음을 폭로하는 데 있지 않다.

장르 서사와 관련된 이야기의 경제학이라는 관점이 아니라 서사 구조의 역동성, 형식의 기능 면에서 보자면 초반부 장면들의 존재가치는 충분하다. 리스베트와 미카엘의 스토리를 교차로 배치하는 초반의 두 갈래 플롯은 그들이 겪는 사건의 연관성을 통해 네트워킹되고 있다. 미카엘이 의뢰받은 사건은, 강간과 살인으로 점철된 방예르 일가의 히스토리를 배경에 깐 10대 소녀의 미제 실종사건이며, 리스베트 역시 복지의 왕국으로 위장된 강간의 왕국의 위세를 몸소 체험하고 있는 상태다. 조금 더 근원적으로 들어가자면 이들은 데이비드 핀처의 범죄 이야기적 특성과 연관된다. <파이트 클럽> <소셜 네트워크>에서처럼 핀처는 시공간적으로 나뉜 액션을 동시적으로 교차시키는 플롯을 쓰는데, 미카엘과 리스베트의 스토리는 드라마의 중반까지 기차 레일처럼 평행을 이루며 달려간다. 두 사람이 만나기까지 그들이 겪는 별개의 스토리는 각자 독립성을 가지고 어떤 방식으로도 엮이지 않기 때문에 관객은 한편의 영화에서 두개의 스토리를 보고 있다는 느낌을 갖는다. 심지어 두 사람간의 합작이 본격화되고 사건의 전말이 드러나는 순간에도 그들은 각기 다른 장소(미카엘은 자신의 집에서, 리스베트는 방예르 산업의 본거지에서)에서 다른 경로(사진들)로 범인의 실체를 확인한다. 미카엘의 미션에 합류하기 전까지 리스베트의 스토리는 영화 안의 작은 영화처럼 끼워져 있다. <소셜 네트워크>에서 플래시백의 도움을 받지 않고 현재와 과거의 시간을 교묘하게 엮어냈던 것처럼 <밀레니엄>에서 두개로 나뉜 스토리를 네트워킹하는 핀처의 서사 구축 방식은 또 하나의 비평 주제가 될 수 있지만 아쉽게도 이 글의 요지는 그게 아니다.

장르 서사로서 <밀레니엄>이 가지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유심히 보게 된 이유는 ‘이미지의 스토리텔링’이라는 독창적인 문제해결 방식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미국 버전과 스웨덴 버전은 확연히 차이난다. 미스터리를 푸는 미카엘의 소임은 조각난 단서들을 그러모아 구멍이 숭숭 뚫린 40년 전 사건을 완결된 스토리로 재구성해내는 것이다. 방예르 집안의 가계(家系)를 이루고 있는 인물들의 행적과 주변인의 증언, 하리에트의 수첩에 적힌 이니셜과 숫자들, 경찰과 회사의 기록, 인터넷에 흩어진 미분화된 정보들, 그리고 사진! 무엇보다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요체가 되는 것은 이 사진이다. 물론 원작과 스웨덴 버전에서도 사진이 핵심적 역할을 하지만 핀처는 미카엘과 리스베트의 추리 과정을 이미지 제작자의 스토리텔링으로 변형시키면서 텍스트를 한편의 메타영화로 둔갑시킨다. <밀레니엄>에서 사라진 하리에트의 행방에 대한 추적은 시네마틱 이미지의 작동방식을 따른다. 미카엘과 리스베트의 추론은 사진, 더 정확하게는 자료 목록에는 존재하나 아무도 보지 못했고, 따라서 그 의미를 해독하지 못했던 사진을 단서로 삼아서 진행된다. 그들은 헨리크와 형사 모렐이 40년간 뒤져온 자료들에 기초하여 정보의 이파리가 아니라 정보의 뿌리와 가지를 뒤진다. 헨리크와 모렐이 놓친 것은 무엇인가? 무엇을 놓쳤고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가? 헨리크와 모렐의 스토리텔링은 하리에트가 사라진 순간의 신(scene)을 완벽하게 구성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장면을 구성하는 프레임 내 요소들을 완전히 판독하지 않았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주요한 액션들의 형태와 의미에 밀착하지 못했으므로 파편화된 이미지들의 논리를 인과론적으로 추측해내지 못한 것이다. 헨리크와 모렐의 실패를 교훈 삼아 미카엘은 하나의 이미지가 아니라 그들과 인접한 방계 이미지들로 범위를 넓히고 치밀한 이미지의 스토리텔링을 기도한다.

미카엘과 리스베트의 추론에 담긴 내용만큼이나 영화가 흥미로워지는 지점은 탐사의 진행이 정지된 사진을 움직이게 만드는 시네마틱한 행위를 통해 이루어지면서다. 미스터리 해결은 곧 이미지의 스토리텔링을 통한 이 구멍이 많은 장면의 완성에 있다. 환언하면 미카엘과 리스베트는 정지 상태의 포토그램(photogram)을 재료로 스토리텔링을 해나가는, 영화감독이 하는 일을 한다. 방예르가(家) 사람들은 그들이 찍는 영화의 등장인물들이고 파편화된 인물들의 행적에 의해 사건이 발생하고 스토리는 조금씩 연결되기 시작한다. 미카엘은 벽에 붙여놓은 사진과 기사, 메모를 재료로 하여 이야기를 완성해가는 강박적인 이미지 제작자가 된다. 메타영화로 <밀레니엄>을 읽을 때, 제기될 수 있는 질문들을 따라가면서 영화는 완전히 새로운 국면으로 넘어간다. 그러니 이 음험한 가족사의 뒤안에 놓인 진실의 무게보다 이미지의 재구성을 통해 스토리가 완성되는 과정에 집중하는 것이 열배는 흥미진진하다. 핀처는 음모와 학살, 반전으로 점철된 미스터리한 실종사건을 점점이 박힌 사진 조각의 모자이크로 디자인한다. 스웨덴 버전에서는 이 과정이 조금 다른데, 사진을 통한 추리는 한 시간을 조금 지나 완료되고, 하리에트가 남긴 난수표 같은 이니셜과 숫자의 비밀을 밝히는 데 상당한 시간이 할애된다. 핀처의 버전은 이야기의 잔가지들을 생략한 채 사진의 조작과 변형을 통한 이미지의 스토리텔링에 모든 걸 집중한다.

<밀레니엄>은 이미지의 힘과 논리에 대해 질문하면서 프레임 안팎에서 벌어지는 이미지 요소들의 상호작용을 탐색한다. 영화감독이 이미지를 구성할 때 또는 관객이 그것을 판독할 때 통상 두 가지 과정이 필요하다. 프레임 안에 기입된 일체의 요소들 중 의미있는 정보(인물이나 세트, 소도구, 모티브)를 분별해내는 선택과 프레임 안에만 머물지 않고 안과 바깥이 주고받는 상호작용을 살피는 것이다. <밀레니엄>에서 미카엘과 리스베트는 이 두 방향의 탐문을 동시에 진행한다. 선차적으로 그들은 프레임 안에 흩어진 여러 디테일 중 스토리 구성에 유용한 데이터를 추리고, 추려진 데이터의 의미와 관계를 해석한다. 조각조각 분리된 사진들과 정보의 모음집에서 스토리를 추론하는 미카엘과 리스베트를 따라 관객은 어떤 연관성도 없어 보이는 숏들을 몽타주하는 감독의 심정이 되어 드라마를 구성해야 하는 것이다. 누군가는 이것이 영화의 공로라기보다 영화적 상상력을 한껏 활용한 원작에 힘입은 것이라고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소설은 소설이고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

카메라의 눈이 되어보기

이미지들간의 협상과 긴장이라는 전략이 작동하면서 진행되는 미카엘과 리스베트의 스토리텔링 과정을 따라가보자. 스토리의 결말에 도달하기까지 감독 미카엘과 공동감독 리스베트는 9장 정도의 사진을 판독한다. 그중 미스터리의 전모를 밝히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는 사진은 서너장이고 나머지는 스토리텔링이 분기점에 도달하기까지를 이끄는 참조적인 이미지들이다. 사진 이미지들에 대한 연쇄적인 추리를 주관하는 것은 프레임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대한 미시적인 관찰, 부분적 요소들의 확대와 변조, 프레임 안과 바깥의 관계에서 연역된 이웃한 이미지의 탐문이다. 이미지들 사이의 연관성을 해명하는 것은 영화감독이 하나의 신 또는 시퀀스를 논리적으로 완성하기 위해 기울이는 작업을 역으로 더듬어가는 과정이며, 숏의 논리에 따라 연출의 작의를 해석하는 관객의 행위와도 포개진다.

사건의 핵심에 도달하기 위해 미카엘이 해독하는 첫 번째 이미지는 하리에트가 실종된 날 있었던 요트클럽 퍼레이드 사진이다. 헨리크가 보낸 자료 꾸러미에서 발견한, 레데스타드 신문에 실린 사진은 인파들로 북적이지만 미카엘은 프레임 안의 하리에트에 주목한다. 레데스타드 신문의 사진기자가 찍은 한장의 사진을 빌미로 그는 신문사 슬라이드 필름들을 구해 일련의 사진을 연결해 하나의 시퀀스를 만든다. 정지된 포토그램을 움직이는 동영상으로 변형하는 이 과정은 시네마의 창조과정과 일치하며 그는 사진 안의 작은 단서에서 비롯된 파장으로 이미지의 스토리텔링을 만들어간다. 처음 보았던 사진, 그것과 이웃한 일련의 사진들을 탐문하면서 미카엘은 하리에트가 실종되기 직전(사진에서 사라지기 직전)에 무언가를 보았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 슬라이드 필름을 이어본 결과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다 안색이 굳어지는 표정에서 하리에트의 심경 변화가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화면 바깥의 대상에서 그녀는 무언가 위협을 느낀 것이다. 실종 직전의 상황을 증거하는 퍼레이드 사진은 이후 전개될 스토리텔링의 뿌리가 되는 최초의 이미지다.

최초 이미지에서 두 번째 이미지가 파생한다. 앞선 40년 동안 이 사건을 탐문했던 탐정들(헨리크와 모렐)이 깊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흘려버린 존재를 발견하는 것은 리스베트이다. 리스베트는 퍼레이드 사진에서 하리에트가 응시한 대상은 누구인가? 를 생각해내려는 미카엘에게 힌트를 준다. 하리에트가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 화면 밖 대상을 응시하는 순간에 그녀의 머리 뒤에서 한 구경꾼의 카메라가 플래시를 터뜨린다. 핀처는 하리에트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과 카메라 플래시가 터진 시간을 정확히 일치시켜 보여준다. 스웨덴 버전에서는 하리에트의 시선과 카메라의 시선이 일치하지 않는데, 여기에는 중대한 차이가 있다. 핀처는 카메라에 담긴 이미지를 하리에트의 시점숏으로 구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듯싶다. 프레임 내의 미세한 디테일에 주목한 미카엘은 플래시를 터트린 여인의 카메라에는 하리에트가 응시한 대상이 찍혀 있으리라는 추정에 도달한다. 이미지 자체가 아니라 화면 바깥을 향한 하리에트의 시선에 대한 주목은 인접한 이미지들과의 상관성, 프레임 바깥의 영역으로까지 인식을 확장하는 시네마틱 이미지에 대한 이해력을 보여준다. 그녀는 무엇을 보는가? 이러한 질문은 시선의 주체와 대상이 맺는 관계라는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빌미가 된다. 미카엘은 슬라이드 필름을 뒤적여 카메라를 든 여인이 목수와 결혼하여 레데스타드 섬으로 여행을 왔다는 걸 확인하고 그녀의 집을 수소문해 찾아간다. 마침내 미카엘은 카메라를 든 여인에게서 하리에트가 응시한 화면 바깥의 영역이 찍힌 컬러 사진을 카피한다. 첫 번째 퍼레이드 이미지, 두 번째 카메라 든 여인이 찍은 이미지의 관계는 말하자면 숏(shot)-역숏(reverse shot)에 해당한다. 스웨덴 버전과 달리 그 순간 핀처가 플래시를 터지게 연출한 이유는 카메라에 찍힌 것이 하리에트의 시점숏(point of view)이라는 걸 신호하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이 시점숏만으로 하리에트의 얼굴에 서렸던 공포의 징후가 완전히 해독되지 않는다. 이와 관련하여 숨겨진 진실을 드러내는 것은 아무도 보지 못했던 또 하나의 이미지다.

두 번째 컬러 사진에서 의미있는 정보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와중에 미카엘은 하리에트가 사라진 날 섬과 육지를 연결하는 교각에서 있었던 유조선 추돌 사건과 그 조사 과정을 찍은 하랄드의 사진에서 무언가를 발견한다. 이 장구한 스토리텔링에 방점을 찍는 이 세 번째 사진에서 미카엘이 발견한 일련의 이미지들을 연결하는 작은 공통점이다. 그 이미지에는 프레임의 중심에 선명하게 헨리크가 찍혀 있고, 전경에 누구인지 분별할 수 없을 정도로 포커스 아웃된 형상의 한 인물이 찍혀 있다. 하랄드는 그가 “고드프리트의 아들 마르틴”이라고 증언하고, 최전경에 찍힌 마르틴의 가슴에는 큼지막하게 웁살라학교의 엠블럼이 박혀 있다. 이 엠블럼은 카메라를 든 여인의 컬러 사진에서 핑크색 풍선에 얼굴이 살짝 가려져 정체를 분별하기 힘들었던 한 청년의 가슴에 박혀 있던 것과 일치한다. 이제 하리에트가 누구를 보았는가는 분명해진다. 같은 시간에 리스베트는 또 다른 사진을 통해 범인의 정체를 확인한다. 방예르 산업과 여인들의 연쇄살인이 벌어졌던 장소의 상관성을 탐문하던 리스베트는 마르틴이 마지막 살인이 발생했던 웁살라의 학교에 다니고 있었으며, 웁살라학교 엠블럼이 새겨진 교복을 입고 그가 찍은 신문 기사 사진을 발견한다. 리스베트 역시 이 사진과 카메라 든 여인의 컬러 사진의 관계로 결론에 도달하는데, 결과적으로 리스베트와 미카엘은 서로 다른 장소에서 동시에 범인이 누군지를 깨닫게 되는 셈이다.

<밀레니엄>에서 핀처는 미카엘과 리스베트의 이미지에 기초한 추론을 영화의 창조과정으로 치환한다. 프레임은 크기와 형태, 스크린 안과 스크린 바깥, 거리와 앵글, 레벨 등을 조절함으로써 이미지 내부의 요소들을 바라볼 수 있는 최상의 지점을 찾는다. 어떤 기계라도 해킹할 수 있고, 어떤 암호라도 해독할 수 있는 리스베트의 침투력에 필적하는 것은 그녀와 미카엘이 이미지를 통제하는 능력이다. 영화를 볼 때 우리는 프레임 안에서 여러 흔적들을 읽고 그를 빌미로 의미를 추론하거나 이야기를 만든다. <밀레니엄>이 던지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영화 이미지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미지 안의 데이터들을 어떻게 잘 읽어낼 수 있는가? 이미지의 안과 바깥에서 어떤 작용이 일어나는가? 프레임 내의 배열과 공백에서 무언가를 읽어내는 행위, 이미지 정보에 대한 해석, 화면의 안과 바깥에서 벌어지는 액션에 대한 추론, 이미지를 바라보는 자의 시선은 시네마의 본성과 직접 연결된다. 영화 이미지는 프레임의 구성과 프레임 안에 수수께끼와 같은 공백으로 남겨진 흔적들간의 관계를 통해 정의할 수 있다. <밀레니엄>은 최근에 나온 어떤 영화보다 깊이있고 분석적으로 이러한 문제들에 말을 건넨다.

프레임 바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이미지는 그 자체로는 불완전하다. 하나의 이미지만으로 세계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에 도달할 수 없다. 이미지는 잘게 썰린 현실의 조각이며 누군가의 시선에 의해 틀지워진 제한된 시계(視界)만을 우리에게 제공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네마틱한 이미지를 해독하는 데 고려해야 할 것은 프레임 내부만이 아니라 틀 바깥, 그것과 이웃한 세계들이다. 영화에서 프레임 바깥 공간은 내부와 단절되기도 하지만 연속성의 논리에 따라 프레임 안에 영향을 미치는 상관적인 관계를 맺기 때문이다. 프레임의 경계를 초월해 의미와 해석의 준거가 되는 이 화면 밖 공간은 물론 프레임 안에 산개된 정보들과의 네트워크를 통해 잠재적 중요성을 얻게 된다.

<밀레니엄>의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이미지 스토리텔링의 초점은 프레임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공백을 어떻게 읽어내는가에 있다. 회화의 프레임과 영화의 프레임이 결정적으로 구별되는 건 영화는 프레임 안에 포함되지 않은 잔여들을 함축한다는 것이다. 프레임 안에 포함되지 않은 프레임의 바깥 영역은 별개의 세계가 아니며 프레임 내부와 지속적으로 작용하는 안과 연결된 바깥이다. 프레임 안에는 언제나 프레임 바깥을 함축하는 신호들이 내재해 있다. 미카엘과 리스베트는 이미지의 가장 헐벗은 영역, 인간의 눈이 미치지 못하는 프레임 바깥 공간에 대한 직관적 추론을 거듭하는 방식으로 진실에 접근해간다. 두 사람이 40년 동안 아무도 풀지 못했던 미스터리를 해결할 수 있었던 것도 프레임 안과 연결된 바깥 세계, 하리에트의 시선과 이미지 안에서 또 다른 이미지의 존재를 함축하고 있는 카메라를 인식했기 때문이다. 카메라를 든 여인이 터트린 플래시는 이 바깥의 영역과 시네마의 작동방식을 함축한 기호이다. 프레임 바깥은 따라서 이미지를 바라보는 관객의 지각에 제공되는 모든 총체적인 것들을 포함한다. 미카엘과 리스베트가 최초의 퍼레이드 사진을 통해 하리에트의 현존과 그녀가 응시한 대상, 그녀와 대상의 관계, 화면 밖 대상을 포착한 또 다른 이미지를 더듬어 찾아냈듯이 이미지를 통한 스토리텔링은 한 시공간을 감싸고 있는 세계의 총체적인 재구성이라고 할 수 있다.

데이비드 핀처의 범죄스토리에서는 언제나 세계의 공백, 단편적인 이미지만으로 도달할 수 없는 가려진 영역에서 범죄가 발생한다. 미카엘과 리스베트가 이미지의 목록을 통해 폭로하는 것은 이 숨겨진 영역들 사이의 네트워크이며 그들의 결속으로 잉태된 비극이다. 이같은 이미지의 스토리텔링은 이 글의 서두에 언급했던 드러나지 않는 공백, 숨겨진 영역에서의 폭력과 테러라는 핀처적인 주제와 맞물린다. 훌륭한 탐정(또는 영화감독)은 이미지와 이미지의 연쇄, 상관관계를 능동적으로 추급할 때에 하나의 의미에 도달할 수 있다. 미카엘과 리스베트의 협업은 이러한 흔적들을 전송하고 그것을 목격하고 판독해낸다. 그러니 그들이 탁월한 영화감독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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