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케줄이 꼬였다. 커버스타 인터뷰가 예상보다 늦어졌고, 고아라는 최민식, 하정우 두 선배 배우들과 맞닥뜨리는 상황이 됐다. 스튜디오 문을 열고 들어오는 고아라를 보면서 이렇게 넘겨짚었다. 선배들과 시선 마주치기조차 어려우니 그냥 분장실로 직행하겠지, 그런데 웬걸. “안녕하세요. 고아랍니다!” 선배들 앞에 가서 또렷한 목소리로 배꼽인사를 한다. 심지어 최민식에겐 새해인사까지 곁들인다. <반올림>(2003)을 시작으로 드라마 <눈꽃>(2006), <누구세요?> <맨땅에 헤딩>, 영화 <푸른 늑대: 땅끝 바다가 다하는 곳까지> <스바루> 등에 출연한 10년차 배우 고아라. 그녀는 여전히 자신을 ‘신인배우’로 규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페이스 메이커> <파파> 등 2012년 초에 한국영화 2편을 양손에 들고 찾아온 고아라는 인터뷰 내내 ‘이름있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몇번이고 말했다. 보일락 말락이 아니라 제대로 튀는 그런 배우.
-<페이스 메이커>와 <파파>가 같은 날 개봉할 뻔했죠. =정말 다행이에요. 압박감이 엄청났거든요. 이쪽 가면 김명민 선배님이 ‘아라야, 열심히 해야지’ 하시고, 저쪽 가면 박용우 오빠가 또 그러시고. 어쨌거나 두 영화 모두 홍보해야 하는 때가 있을 텐데, 그땐 정신없이 뛰어다녀야겠죠.
-촬영 시기도 거의 비슷하지 않았나요. =<페이스 메이커> 촬영 후반에 <파파> 시나리오를 받았어요. <페이스 메이커>를 찍은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미국 애틀랜타로 가야 했어요. 미국 가서 ‘명민 선배님이나 안성기 선배님은 잘 계실까’ 이런 생각을 할 정도로 짬이 없었죠.
-<페이스 메이커>는 한국영화만 놓고 보면 데뷔작이에요. =다른 시나리오 놓고 고민을 한 적이 있었어요. 그러다 <페이스 메이커> 시나리오를 받았는데, 지원이라는 캐릭터가 눈에 들어왔어요. 지원은 좋아하는 운동을 시작했지만 외모로 얻은 인기 때문에 제 길을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인물이잖아요. 제 또래의 고민과 다르지 않아서 끌렸죠.
-고아라와 유지원도 닮았나요. =<반올림>으로 데뷔했을 때 저도 연기가 좋아서 시작을 한 거잖아요. 그런데 그 이후로는 광고 이미지만 부각되니까. 한번은 이런 적도 있어요. 2007년이었나. ‘보일락∼말락∼’ 음료 광고 아시죠? 지나가는 누군가가 저보고 “보일락 말락이다!” 그러는 거예요. (웃음) 그런 관심도 고맙지만, 이젠 작품으로 좀더 다가가야겠구나 싶었어요.
-장대높이뛰기 선수라. 몸치라면 아예 엄두도 못 냈을 텐데요. 운동신경은 좋나요. =몸 쓰는 거 좋아해요. 물론 시나리오 읽을 때만 해도 장대높이뛰기에 대해 전혀 몰랐어요. 뛰어가서 장대로 찍고 바를 넘으면 된다, 뭐 그 정도의 얕은 상식밖에 없었죠. 그런데 알고 보니 머리부터 발톱까지 근력과 체력이 요구되는 운동인 거예요. 그래서 2kg짜리 아령으로 기본 체력훈련부터 시작했죠. 나중엔 10kg짜리 아령을 쓸 정도로 과하게 했죠.
-도약장면은 실제 선수처럼 느껴졌어요. =감사합니다! 사실 도약하는 데까지만 최소 1년이 걸린데요. 무릎을 직각으로 유지한 채 캥거루처럼 통통통 뛰려면 말이죠.
-장대를 처음 잡았을 때의 느낌이 기억나나요. =제대로 들지도 못했어요. 팔은 부들부들하지. 잘 모르시죠, 그 느낌? 평행으로 드는 건 그래도 할 만한데 중간에 장대를 아래로 떨어뜨려야 하잖아요. 무게중심이 한쪽 끝으로 쏠리는데 그때는 무게가 배가 돼요. 내가 과연 이걸 들고 뛸 수 있나 싶었죠. 막막할 때 코치님들이 일러주신 방법이 뭐였냐면 이미지 트레이닝이었어요. 침대 곁에 부러진 장대를 놓고 방 모서리에 꽂는 연습과 상상을 수없이 했어요. 나중에 어머니가 그러셨어요. “네 남친 이름이 이장대냐?” 썰렁한가요? 제가 개그 욕심이 좀 있어서.
-바를 넘는 장면은 와이어에 매달려 찍었잖아요. =와이어 촬영은 드라마 때 많이 해봐서 별로 무섭진 않았어요. 번지점프도 많이 해봤고. 근데 물구나무 서듯이 바를 넘어야 하는 이유를 처음엔 잘 모르겠더라고요. 지상에서 연습하다가 막상 공중에서 해 보이려고 하니까 헷갈리기도 하고. 게다가 한번 뛰고 나면 어깨에 무리가 가서 목이 잘 안 돌아가요. 그래도 단기간에 강훈련을 하고 촬영에 들어갔더니 힘이 났어요. 아킬레스건염 때문에 발목이 아리긴 했지만.
-김명민, 안성기 두 선배 배우들과의 작업은 어땠어요. =안 선배님은 예전 경험담을 정말 많이 들려주셨어요. <파파> 때문에 미국 간다고 하니까 제가 태어나기도 전인 1970년대에 해외 로케이션을 가셨던 이야기도 들려주시고. 그걸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공부가 됐죠. 명민 선배님은 캐릭터와 동일 인물이 되기 위해 잠시도 쉬지 않으셨어요. 한번은 산 위로 뛰어올라가는 장면을 찍었는데, 촬영이 끝 나고 내려갈 때도 뛰어가시고, 심지어 차가 있는데도 땡볕 아래 숙소까지 뛰어가셨어요. 그런 걸 보는데 자극을 안 받을 수 있나요. 새벽에 400m 트랙을 도는 장면을 찍을 때였는데, 저도 뭔가 보여드리려고 했죠. 그런데 초반에 너무 전력질주하는 바람에 나중에는 체력이 바닥나서. 그런데 명민 선배님은 8시간 촬영 내내 숨 한번 헐떡이지 않으셨어요.
-대사를 주고받을 땐 그래도 적잖이 긴장했을 텐데요. =긴장하긴 했는데, 좋은 점도 있어요. 선배님들이 하시는 연기를 더 많이 관찰할 수 있거든요. 게다가 영화는 드라마와 달리 앞뒤 상황을 염두에 두고 연기를 할 수 있고, 그 안에서 디테일을 세심하게 찾을 수도 있으니까 좋았어요. 물론 제 연기야 여전히 부족한 것투성이고, 많이 배워야 하는 단계지만.
-<파파>의 준은 <페이스 메이커>의 지원과는 굉장히 다른 성격의 인물인데. =일단 자라온 환경 자체가 달라요. 동양계 미국인이며, 소녀가장이거든요. 한국인 엄마가 죽은 뒤에 배다른 다섯 동생들을 데리고 살아가는 친구예요. 어린 나이지만, 책임감도 강하고 까칠하고 터프하고. 투정부릴 나이에 아줌마 정신으로 무장한 소녀랄까.
-<파파>에선 기타 들고 춤추고 노래까지 했다면서요. =지난해 여름이 정말 힘들었죠. 장대높이뛰기 훈련 4시간 하고 나서 기타 레슨 2시간 받고, 보컬 레슨 2시간 받고. <파파>는 영어 대사가 절반이라 과외도 따로 받아야 했고, 또 안무 연습도 해야 했으니까요. 한달 반 정도의 빠듯한 미국 촬영은 매일매일이 미션 수행하는 기분이었어요. 특히 준이 1차 오디션에서 보여주는 남성적인 춤은 정말 힘들었어요. 다리 찢는 장면에선 다리가 찢어지는 부상도 입었고. (웃음)
-<페이스 메이커> <파파>처럼 미션이 많은 영화에 다시 출연할 생각이 있나요. =그럼요. 도전할 게 있으면 집중하기가 더 쉽거든요. 제가 활발한 편이에요. 몰입도 잘하고. 어렸을 때 제 꿈이 아나운서였어요. 채림 언니 나오는 드라마 <이브의 모든 것>을 보고서, 정직한 아나운서가 되겠다고 성적까지 끌어올렸죠. 심지어 회장, 부회장 선거에도 나가고.
-<푸른 늑대: 땅끝 바다가 다하는 곳까지>(2006), <스바루>(2009) 등의 합작영화에는 어떻게 출연하게 됐나요. =<푸른 늑대: 땅끝 바다가 다하는 곳까지>는 칭기즈칸 일대기를 다룬 영화인데, 일본 매니지먼트사인 에이백스에서 제의를 해서 오디션을 봤어요. 고거기나 조미 같은 중국 배우를 굉장히 좋아하는 데다 마침 중국어도 배우고 있었고. 물론 캐스팅이 될 거라는 기대는 안 했죠. <스바루>는 중국 프로듀서인 빌 콩 덕분에 참여하게 됐는데, 무려 5개 국어가 난무하는 촬영현장이었어요. (웃음)
-어린 나이에 연기를 시작했잖아요. 어때요, 돌아보면. =중학교 2학년 때 <반올림>의 옥림이를 맡아서 2년 동안 매주 찍었어요. 끝내고 나서는 내가 옥림인지, 고아라인지 헷갈리는 거예요. 사람들 만나면 옥림이처럼 행동해야 하는 건가. 뭐 이런 대혼란이었죠. 그래서 드라마 <눈꽃>(2006) 찍고 곧바로 일본으로 떠났어요. 지금이야 그냥 추억이죠. 옥림이처럼 2년 정도 쭉 맡을 수 있는 역할이 주어진다면 당연히 해야 하고. (웃음) 또 사극도 언젠가 해보고 싶고, 진한 멜로도 해보고 싶고. 어쨌거나 더이상 인형이 아닌 배우로 도약하고 싶어요.
-첫 발판이 두개이니 도약이 쉽지 않을까요. =두편 모두 힘껏 딛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더 높이 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