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출신의 피터 휴잇이라는 감독이 연출한 유명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비범하지도 않은 <메이든 헤이스트>(2009, 사진)라는 코미디영화가 있다. 취향에 미친 세 노인네에 관한 영화다. 미술관의 경비원으로 일하는 로저(크리스토퍼 워컨)는 미술관에 걸려 있는 <외로운 여인>이라는 그림을 평생 곁에 두고 볼 수 있는 걸 인생의 유일한 낙으로 삼고 살아왔는데 어느 날 이 그림이 덴마크의 코펜하겐으로 가게 됐다는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듣는다. 그즈음 그는 미술관의 다른 경비원 두 사람, 찰스(모건 프리먼)와 조지(윌리엄 H. 메이시)도 자신과 같은 심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찰스는 고양이를 안고 있는 여인의 그림 한점을, 조지는 늠름한 남성의 나체 동상 한점을 평생 남몰래 애지중지해왔던 거다. 그들이 마침내 각자의 취향을 위해 합심하여 이 세 미술품을 탈취한다는 어처구니없는 내용의 코미디다. 세 사람의 나이를 대강 어림짐작으로 합할 때 200살은 넘어 보이니 적어도 내가 아는 한 최고령 ‘하이스트 무비’ 주인공들이자 가장 귀여운 좀도둑 영화에 속하는 것 같다.
얼마나 지난 뒤인지는 모르겠으나 여하튼 우연찮게 별 생각 없이 어느 전시회에 들렀다가 20세기 초기에 활동한 그러나 나로서는 잘 알지 못하는 어느 미국 화가가 그린 1920년대 그림 한점을 보았다. 에드워드 호퍼 등 유명세 있는 화가들의 그림과 함께 걸려 있는데도 하필이면 그 그림만 눈을 찌르고 들어와 한참을 떠날 줄 모르고 그 앞에 서 있었다. 아주 가끔이나 그림을 보러 가는 무식한 처지에 그런 생각을 해본 적 없는데 평생 처음으로 얼마면 이 그림을 살 수 있을까 자문해보았고 실은 그 가격이 얼마이든 나의 가계로 그걸 해결할 순 없을 것이니 그럼 <메이든 헤이스트>의 살짝 정신 나간 노인들처럼 훔치는 건 어떠한가 하는 머릿속 농담에 이르렀던 기억이 난다. 그 그림의 내용과 제목을 말하고 싶진 않다. 언젠가 어디에선가 그 그림이 돌연 없어진다면 그건 아마 저 영화의 노인들처럼 내가 훔쳤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런 헛소리를 하고 있나 싶어 돌이켜보니, 시청자의 한 사람으로서 수년간 즐겨 봐왔으나 대략 몇년 전부터 부쩍 질적으로 저하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개인적으로 더이상 애정을 갖기 어려워진 EBS <세계의 명화>와 <일요시네마> 때문이다. 그림이면 목숨 걸고 훔치기나 하면 되지, 토요일 밤이나 일요일 낮에 텔레비전 앞에 앉아 약간은 철지난 운치에 젖은 채 구식의 경로로 영화 보기를 즐기던 나의 취향은 요즘 사라졌다. 그런 취향을 만족시켜주던 그 프로그램들은 훔칠 수도 뺏을 수도 없는 그런 것 아니겠나 하는 생각 때문에 이런 헛소리가 나왔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