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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딕슨 카의 탐정들에게 기회를!

추리소설 속 전설의 명탐정들을 어떻게 영화로 소화할 것인가?

(좌)<검찰측 증인> (우)<위험한 횡단>

고전 추리소설을 각색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이른바 명탐정이라는 인물들이 얼마나 정적인 사람들인지 생각해보라. 그들은 사건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지도 않고 육체적 액션도 많지 않다. 작가의 인기만 생각하고 접근했다간 낭패당하기 일쑤다. 셜록 홈스 영화가 그렇게 많은 건 그가 보통 명탐정들보다 훨씬 육체적인 인물이기 때문이다.

의심난다면 애거사 크리스티 각색 영화들 중 성공한 작품들을 보라. <검찰측 증인>(Witness for the Prosecution, 1957)처럼 탐정이 나오지 않는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그들은 영화보다는 텔레비전이 더 잘 어울린다. 아마 예외가 있다면 토미와 터펜스 정도? 하긴 가장 먼저 각색된 크리스티 소설도 이들의 출연작이었다. 파일로 밴스, 엘러리 퀸, 드루리 레인도 각색하기 어려운 건 마찬가지. 여러분은 지금까지 나온 엘러리 퀸 영화들 중 한편이라도 아는 게 있는가? 이들의 작품을 제대로 살리려면 영화보다 어드벤처 게임을 만드는 게 낫다. 하드보일드 소설의 주인공들은 사정이 낫지만, 그들은 이미 수없이 영화화되었다.

그래도 그들 중 괜찮은 작가는 누가 있을까. 난 일단 존 딕슨 카(카터 딕슨)를 뽑겠다. 일단 그는 퍼즐 추리소설의 황금기를 대표하는 작가이니 자격이 충분하다. 그리고 이 작가의 작품 중 제대로 각색된 영화가 별로 없다. 그중 유명한 건 기데온 펠 단편 <B-13 선실>을 각색한 지닌 크레인 주연의 <위험한 횡단>(Dangerous Crossing, 1953) 정도인데, 여기엔 기데온 펠 캐릭터가 쏙 빠져 있다! 이해한다. 펠 박사가 위기에 빠진 여자주인공과 연애를 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그래도 난 여전히 존 딕슨 카의 탐정들에게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본다. 이들 중 상당수는 크리스티 소설처럼 영화화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래도 크리스티보다는 훨씬 시각적이다. 그리고 기데온 펠 정도라면 좋은 배우를 기용해 한번 도전해볼 만하지 않을까? 그는 복잡하게 짜인 미스터리 속에서도 독자(그러니까 이 경우에는 관객)를 지루하지 않게 할 정도로 신나는 인물이다. 그리고 그의 전공인 밀실 미스터리는 소설보다 영화에서 더 효과적이다. 문제가 있다면 일반적인 시나리오작가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그가 주연보다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 역할을 하는 조연에 가깝다는 건데… 그렇다면 그냥 조연으로 하면 되지 않을까? <연속살인사건>은 어떤가? 충분히 스크루볼 코미디 재료로 쓸 수 있는 로맨스와 코미디가 있고 제2차 세계대전과 스코틀랜드 유령 전설이라는 흥미진진한 소재도 있다. 펠 박사의 비중은 비교적 적지만 그게 오히려 유리하다. 슬프게도.

펠 박사보다도 더 가능성이 있는 존 딕슨 카의 탐정은 파리의 예심판사인 앙리 방코랑이다. 우선 그는 메이저 캐릭터가 아니기 때문에 충분히 영화적으로 각색할 수 있다. 기데온 펠과는 달리 그는 액션도 가능하며 그로테스크한 외모도 시선을 끈다. 그가 담당하는 사건들은 펠 박사의 사건보다 훨씬 멜로드라마틱하고 거창하며 더 영화적이다. 20세기 초반의 유럽 세팅은 향수와 로맨티시즘을 자극한다. 난 어렸을 때 <해골성>을 처음 읽은 뒤로 누가 이 말도 안되는 살인과 고문과 마술 이야기를 영화해주길 바랐다. 하지만 요새는 이 책이 존재하는지 아는 사람이 별로 없는 모양이다. 아쉽기 짝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