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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shion+] 멋있는 패딩은 없다니까요

멋과 불편의 상관관계에 대해 생각하다

<아저씨>

이 자리를 빌려 분명히 해두고 싶은 게 있다. 내가 게으름뱅이이긴 하지만 사기꾼은 아니라는 것. “멋있으세요. 제가 요즘 남자 스타일 책을 쓰고 있는데 그 책에 선생님(혹은 전무님, 혹은 대표님) 이야기를 쓰고 싶어요”라는 말을 남발하고 다니는데 정작 책은 나오지 않으니 그 ‘선생님’들 중 몇분은 내 정체를 의심하지 않을까 싶어 드리는 말씀. 혹시 그분들 중, <씨네21>을 읽는 분이 계시다면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저는 마음만 먹으면 후딱 쓰고, 책은 원고만 넘기면 금방 나옵니다(라고 쓰고 보니 더 사기꾼 같군, 흠;).

각설하고, 내가 저런 말을 하는 경우는 내 눈앞에 있는 남자가 두 가지 필요충분조건을 만족시켰을 때다. 옷을 잘 입은데다(비싼 옷이든, 싼 옷이든…. 그가 어떤 스타일을 추구하든 간에 일단 보기 좋아야 한다), 옷차림의 일부분 혹은 전반적인 분위기가 그의 삶과 인생에 대해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 때. ‘옷을 잘 입으면 당연히 그 사람에 대해 더 궁금해지는 게 아니냐?’고 누군가는 반문할지도 모르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첫 번째 조건과 두 번째 조건 사이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미세하고도 섬세한,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요소들이 존재한다.

그런데 유레카! 최근 두 번째 조건을 만족시키는 데 필요한 요소 중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알아냈다. 며칠 전, 어느 디자인 회사의 CEO와 마주앉아 있을 때였다. 그는 척 보기에도 좋아 보이는 슈트 차림이었는데 슈트가 어쩜 그렇게 몸에 꼭 맞는지 의자 위에 얌전히 놓인(?) 허벅지는 스키니한 청바지를 입은 것만큼이나 타이트해 보였고, 재킷 허리선도 불편해 보이리만치 꼭 맞았다. ‘보기엔 좋지만 입은 사람은 참 힘들겠다’는 생각을 하던 찰나, 그가 선수를 쳤다. “예전에 입던 (벙벙한) 옷들은 이제 못 입겠어요. 슈트를 몸에 꼭 맞게 입어버릇하니 이제 습관이 되어서…. 이제 이런 옷이 트레이닝복보다 더 편하다니까요.” 그러면서 그가 팔짱을 끼자 이번엔 재킷의 팔뚝 부분까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빵빵해졌다. 그 순간, 그가 ‘50대의 성공한 CEO’이거나 말거나 어찌나 귀엽던지… 나는 그의 삶이 궁금해졌을 뿐 아니라, 그가 어느 정도의 무례를 범한다고 해도 참아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진짜 멋이란 비싼 옷을 입었냐, 그렇지 않으냐에서 발생하는 게 아니라 불편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 불편을 감수하는 자세, 그 불편함을 보는 이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게 아닐까. 어쩌면 멋쟁이로서의 삶은 불편함을 무릅쓰고 멋있어 보이고자 하는 의지에서 시작되고 그 불편을 다른 이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하는 동안 끝나버리는 건지도 모른다. 그러니 제발 아저씨들아, 내게 “멋있는 패딩 어디서 팔아요? 원빈이 <아저씨>에서 입은 거 같은…”이라고 묻지 마시길. 세상에 따뜻한 패딩은 있지만 멋있는 패딩은 없다, 고 믿는 사람이니까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