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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민] 뛴다, 뛴다, 뛴다. 인생을 뛴다
장영엽 사진 최성열 2012-01-16

<페이스 메이커>의 김명민

42.195km. 마라토너가 점령해야 할 궁극의 거리다. 하지만 모든 마라토너가 전력을 다해 이 거리를 질주하는 건 아니다. 우승이 유력한 동료의 더 좋은 기록을 위해 30km 지점까지 달리는 마라토너를 페이스 메이커라 부른다. 맡은 역할마다 결승점까지 전력질주하는 배우 김명민과 천재 마라토너를 위해 12.195km를 양보해야 하는 <페이스 메이커>의 ‘페이스 메이커’ 주만호는 얼핏 보면 닮은 구석이 없다. 하지만 사람이 극한의 고통을 이겨내며 달리는 데에는 그 이상의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김명민과 주만호는 공유하고 있다. 그 이유를 김명민에게 들어보았다.

집중력과 집요함

“된다, 된다, 된다, 안심이 된다.” 모 보험회사 광고에서 손을 하늘 위로 쭉 뻗으며 흥겹게 CM송을 부르는 이 남자를 우리는 자주 목격해왔다. 김명민은 이 회사의 간판 모델로 7년여간 활동하고 있다. 하긴 신뢰가 생명인 보험업계에서 누가 그를 놓치고 싶겠는가. 김명민은 작품의 연출력과 스토리를 가늠하기에 앞서 이름 석자만으로도 맡은 역할에 믿음을 불어넣는 보기 드문 배우다. 그에 대한 신뢰감은 무엇보다 자신의 삶을 걸고 배역에 임하는 김명민의 모습에서 비롯된다. 의사(<하얀 거탑>)의 손놀림을 익히려 수술 참관은 물론이고 집에서까지 실과 바늘을 놓지 않고, 루게릭병 환자(<내 사랑 내 곁에>)를 연기하기 위해 20kg이라는 극한의 체중 감량을 감내한 그의 집중력과 집요함은 어제오늘 알려진 일이 아니다. 하지만 상상을 뛰어넘는 연습량만이 배우 김명민에 대한 찬사를 대변하는 건 아니다. 김명민의 진가는 그가 각고의 노력으로 수집한 캐릭터의 실마리들이 서로 얽히고설키며 마침내 김명민이라는 이름을 지워버리는 순간에 발휘된다. 그 마법의 순간은, 김명민의 신작 <페이스 메이커>에도 예외없이 장전해 있다.

“나는 김명민이 생각하는 건 잘 모르겠고, 주만호로서는 대답할 수 있다.” 인터뷰 도중 김명민은 자주 힘을 주어 이렇게 말했다. ‘연기’를 한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몸이 굳기 때문에 카메라가 돌아가는 순간만큼은 주만호의 마음으로 임했다는 것이다. 천재 마라토너가 올림픽에서 1등선을 끊을 수 있도록 30km 지점까지 페이스를 조절해주는 사람. 주만호는 페이스 메이커다. 김명민이 주만호로 진입하는 첫 번째 과제는 마라토너의 외양을 갖추는 것이었다. 그는 이봉주 선수를 키워낸 오인환 감독의 도움을 받아 매일 20km를 달리며 발의 터치감과 호흡을 익혔다. 지병을 안고 거친 호흡을 내뱉으며 달려야 하는 주만호의 사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인공 치아를 낄 것을 감독에게 직접 제안하기도 했다. “주만호는 페이스 메이커이기 이전에 굉장히 잘 달리는 선수다. 30km 지점까지 한 시간 반 이내에 달리는 선수가 흔치 않다. 그런 사람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최선을 다해 달려야 한다. 그것도 제대로 된 폼으로. 그게 이 영화의 본질이다.” 김명민이 생각했던 ‘본질’은 상체를 곧게 세우고 흔들림없는 주법으로 달리는 주만호의 모습으로 구현됐다. 천재 마라토너를 연기했던 신인배우 최태준이 “김명민 선배님의 달리는 모습이 너무 멋져 함께 뛰는 장면에서 걱정을 많이 했다”고 말할 정도니, 김명민의 연습량이 어마어마했음은 말할 필요도 없겠다.

자서전 쓰는 습관

주만호다운 몸 상태를 갖춘 뒤, 김명민은 그의 마음을 읽어내는 연습을 했다. 몸이 으스러질 것 같은 고통을 몇번씩 넘기면서도 주만호는 왜 달리는 것일까. 동생의 성공이 곧 자신의 행복이라 믿으며 돈을 벌기 위해 스스로 2인자의 길을 걷던 사람이 인생 처음으로 자기만을 위해 달리는 기분은 어떤 것일까. 시나리오에 명시된 장면과 대사만으로 주만호를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한 김명민은 그를 주인공으로 하는 자서전을 썼다. 주만호가 어디서 태어났는지, 어떤 친구를 사귀었는지, 언제 부모님을 여의었는지, 말하자면 <페이스 메이커>의 외전이 될 내용들이 그 자서전에 수록되어 있다고 했다.

“연기하는 사람은 맡은 인물의 이전 시점부터 이후 시점까지 다 꿰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영화의 시점을 표현할 수 있다. 나는 김명민으로 40평생을 살아왔는데 촬영장에 가서 잠깐 주만호로 분장한다고 그가 될 수 있겠나. 영화를 촬영한다는 건 인물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끝까지 찾아가는 과정이다. 크랭크업하는 날까지, 혹은 시사가 열리는 날까지 (스토리를) 계속 찾아야 한다. 그러려면 잠시도 한눈팔 시간이 없다.” 맡은 인물의 자서전을 쓰는 습관은 서울예대 연극과 재학 시절 생겨났다고 하니, 어쩌면 그의 서재에는 김명민 원작의 <이순신> <장준혁> <종우> <주만호>가 빼곡히 꽂혀 있을지도 모른다.

온몸이 마비되고 당장이라도 포기하고 싶은 고통스러운 상황. 마라토너들이 으레 겪는다는 ‘사점’을 오르내리는 역할에 도전하다보니 몰입의 배우 김명민에게도 온전히 주만호일 수 없는 순간이 찾아왔다. 그의 말을 옮기자면, “인생이 머릿속에서 한 바퀴 도는” 경험이었다. “어려웠던 시절, 좋았던 시절, 아팠던 시절, 희망적이었던 시절. 그런 인생의 매 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20대보다 30대 중·후반의 마라토너들이 좋은 기록을 낸다고들 하는데 직접 뛰면서 그 이유를 알게 됐다. 20대들은 인생이 (머릿속에서) 돌다가 끊길 거다. 생각이 멈추면 그때부터는 육체적인 고통이 밀려오는 거지.” 그의 말로 유추해보건대 좋은 마라토너의 자질은 연륜인 듯싶다. 멈추고 싶은 순간 다음 발걸음을 잇게 하는 마음은 결국 삶에 대한 의지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닐까. 한마디 대사 없이 오직 결승선을 향해 달려나가는 주만호의 모습이 <페이스 메이커>에서 가장 깊은 여운을 남기는 까닭도 <불멸의 이순신>으로 주목받기까지 크고 작은 굴곡을 경험해야 했던 김명민의 다채로운 인생의 결과 맞닿아 있으리라 짐작해본다.

언제나 진심이 먼저

“넌 좋아하는 거랑 잘할 수 있는 것 중에 뭐 하면서 살고 싶냐?” 마라톤을 완주하느냐, 페이스 메이커로 출전하느냐를 두고 고민하던 주만호는 자신에게 묻고 싶은 질문을 장대높이뛰기 선수 지원에게 한다. 같은 질문을 김명민에게 던졌더니, “좋아하는 것이 연기였고, 그걸 계속 하다보니 지금까지 왔다고 생각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런데 이 답변이 말의 핵심은 아니다. “자기가 좋아하면서도 잘할 수 있는 걸 하는 게 최고일 거다. 하지만 굳이 고르자면 좋아하는 것을 먼저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좋아하면 잘하기 위해 노력하겠지만,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여러 가지 요소를 따지게 될 거라는 생각에서다. 같은 이유로 김명민은 흥행과 세간의 평가에 관계없이 마음을 끌어당기는 작품에만 참여해왔다고 말한다. “좋은 작품이라 해도 마음이 동하지 않으면 안 한다”고 잘라 말하는 그에게는 언제나 기술보다 진심이 먼저다.

김명민의 다음 작품은 재난영화 <연가시>다. 사람의 뇌를 조종하는 기생충 연가시로 인해 국가적인 위기 사태가 발생하고, 그로부터 가족을 지키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가장이 그가 맡은 역할이다. 새해를 맞아 신년 계획을 세웠을 법도 하지만, 김명민에게는 당장 찍고 있는 <연가시>의 촬영을 성공적으로 끝내는 것 외에는 다른 관심사가 없다. “눈앞에 있는 작품을 잘해내지 못하면 다음 작품도 없다”고 믿는 그의 연기 인생에는 시작과 끝이 없다. 그저 매 순간의 42.195km가 펼쳐져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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