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980년대 퀴어시네마의 급진적 액티비스트로 출발한 이래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유럽 예술영화계를 대표하는 시네아스트가 되었다. 트랜스 섹슈얼리티와 욕망의 누선을 자극하는 도착 심리를 앞세운 <내가 사는 피부>는 다중 정체성과 신체 변이, 관계의 교환이라는 그의 80년대적 주제로 회귀한다. 초강력 인공피부를 완성하기 위해 생체실험을 감행하는 의학박사 로버트(안토니오 반데라스)의 목표는 복수와 상실된 이미지(교통사고로 죽은 부인 갈)의 생환이다. 실험대상 베라(엘레나 아나야)의 신체에 대한 로버트의 집착과 베라의 가려진 과거는 여러 갈래로 나뉘는 이 복잡한 플롯이 감추고 있는 비밀의 핵심으로 근접해간다. 플래시백 구조를 통해 피부가 벗겨지듯 표층 아래 놓인 충격적 과거를 누설하는 이 영화에서 서스펜스와 호러, 멜로드라마, SF로까지 영역을 확장한 장르의 교배는 점입가경이다. 강간범은 돌이켜 강간당하고, 복수는 또 다른 복수로 응징된다. <현기증>과 프랑켄슈타인 신드롬, 피그말리온 효과, 프로메테우스 신화, 프로이트 심리학을 열쇠어로 삼아 텍스트를 해석할 수 있겠지만 방사형으로 퍼져나가는 현란한 참조의 목록들은 이야기의 표층에 불과하다. 인물들이 치르는 혼돈스러운 정체성 여행을 다룬 이 영화가 <현기증>으로부터 취한 심층의 동기가 있다면 ‘변이에 대한 고찰’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나쁜 피부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신체 변이의 대상이 되는 것은 베라지만 로버트의 출생의 비밀이나 카인과 아벨을 연상케 하는 로버트-제카의 관계, 어머니-하녀로서 마릴리아의 다중 정체성까지 관계의 변이라는 주제는 전반에 널리 퍼져 있다. 딸을 능욕한 강간범은 희생자-연인이 되고, 자신이 속한 가계(家系)에 무지한 한 남자는 형수와 흘레붙어 야반도주하는가 하면, 호랑이 가죽을 쓴 악동에게 두번이나 연인의 순결을 강탈당한 또 다른 남자는 제 동생인지 모른 채 그를 처단한다. 복잡하게 얽히는 가족관계와 대부분의 남성을 달뜬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는 동물(호랑이 가죽을 쓴 인간)로 묘사하면서 내러티브는 갈피를 잡기 힘든 서스펜스로 치닫는다.
여전히 스타일리시하고 괴상한 취향을 드러내고 있지만 알모도바르 특유의 여성 중심 멜로드라마와 비교했을 때 <내가 사는 피부>는 젠더와 섹슈얼리티에 대한 그의 강박이 투영된 영화로 보인다. 원본의 맥락을 중시하지 않는 이종적 요소들을 네트워킹하는 알모도바르 영화의 특징은 따라서 영화적 수사에만 머무를 수 없다. 장르(genre)와 더불어 섞이는 것이 있다면 젠더(gender)이다. 알모도바르에 따르면 이 두 단어는 스페인어에서는 ‘genero’라는 동음(同音)으로 쓰인다(알모도바르의 모든 영화가 장르와 젠더를 순환하는 건 괜한 일이 아니다)고 한다. 수차례의 강간과 호랑이와의 섹스로 은유되는 수간, 근친성교, 호모 섹슈얼리티, 성전환, 복장도착을 한데 버무린 내러티브는 그 자체로 섹슈얼리티의 경연장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다. 전작 <브로큰 임브레이스>에 새겨진 죽은 이미지의 생환이라는 모티브를 재연하고는 있지만 <내가 사는 피부>는 트랜스 섹슈얼이라는 아이디어에 착상한 이전 영화들과 본질부터 다른 이야기이다. 전작들에서 트랜스 섹슈얼리즘은 작중 인물들이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확증하는 수단으로 묘사되지만, 이 영화에서는 불온하게 가해지는 처벌의 행위이다.
요컨대 ‘강요된 섹슈얼리티’를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라는 다소 윤리적인 질문이 제기되는 것이다. 트랜스 섹슈얼리티를 다루는 알모도바르의 관점은 아주 논쟁적인데, 여기에는 게이-레즈비언 커뮤니티 안에서 격론을 낳을 만한 설정이 얹혀 있다. 영화는 폭력적이고 시끌벅적한 강간장면을 포함하고 있을 뿐 아니라 타자의 욕망에 의해 위조된 성별이라는 민감한 쟁점이 형성된다. 자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폭력적인 육체의 침탈로 인해 발생한 성의 전환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진짜 트랜스 섹슈얼이라면 이같은 설정에 대해 격분할지도 모른다. <내가 사는 피부>를 성전환자를 끔찍하거나 변태적이고 부자연스럽게 표상하지 않지만 생물학적 성별의 변태과정은 누군가에게 심장을 이식해주는 것과는 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문제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육체적으로 변이를 겪는 성전환 여성이 체험하게 되는 세계를 잘 모른다는 점이다.
확실한 건 알모도바르가 트랜스 섹슈얼을 위해 이 영화를 만들지 않았다는 점이다. 어느 정도 그는 욕먹을 각오가 돼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성정치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내가 사는 피부>는 복잡한 감상을 유발할 수 있다. 이 영화는 피부로서의 육체와 내면의 분리를 체험한 자만이 확실하게 진술할 수 있는 내밀한 자기 고백서이다. 알모도바르만큼 이것에 어울리는 감독이 있을까? ‘피부’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의 정체성을 가름하는 외피이며, 로버트의 말처럼 인간을 식별하게 하는 표징이다. 따라서 빈센테에게 가한 피부의 변형, 남근의 거세, 질의 생성과 확장이라는 생물학적 변환은 로버트가 행사한 최고의 복수 행위이다. 빈센테는 꼼짝할 수 없는 무의지의 상태에서 존재를 훼손당한 것이다. 로버트의 심사로만 보자면 그것은 베라가 빈센테였던 시절 행했던 악행의 원인에 대한 원천적인 제거(거세)이다.
로버트는 일종의 조물주이다. 대다수의 관객은 성전환을 통해 여자의 신체를 갖도록 한 이 창조주의 행위가 윤리적으로 불경한 짓이며 부자연스럽다고 여길 것이다. 성전환이라는 행위에 가해질 수 있는 이런 부정적 인식 때문에 성전환자들은 <내가 사는 피부>를 탐탁지 않아 했다. 이런 우려를 입증이라도 하듯 극중 베라는 여자의 것으로 개조된 피부 안에 여전히 남자의 아이덴티티를 간직한 것처럼 보인다. 로버트의 시술은 강제로 변환된 성을 육체에 심는 섹슈얼리티의 압제이다. 그(그녀)는 질 성형술을 받은 뒤 확장기를 사용해 질의 너비를 넓히고, 피부 이식, 가슴 주입으로 완벽하게 여자가 된 뒤 6년 전 자신이 저지른 과오와 유사한 방식으로 짐승(호랑이)에게 강간당한다. 이것은 악행에 대한 처벌인가, 아니면 트랜스의 조건에 대해 무언가를 말하기 위함인가? 서사적 동기화를 보자면 전자가 설득력이 있지만, 후자에 알모도바르의 뜻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복수는 알모도바르의 진짜 관심사가 아니며 의지에 반하는 신체의 변화를 인지한 이후 베라가 체험하게 되는 변화의 과정이 영화의 요지를 말해주기 때문이다.
성전환자들이 느낄 수 있는 불쾌감을 따라 알모도바르를 비난하는 것은 온당한가. 영화 속 한 장면에서 베라는 로버트에게 “나는 항상 여자였다”라고 말한다. 물론 그 순간 베라의 이 말은 기만이고 위장이다. 여기서 알모도바르의 태도는 분열적으로 보인다. 그는 성적 자존감을 유린당한 채 신체가 변형된 베라에게 동정을 표하는 한편 아무도 파괴할 수 없는 내면의 장소에 그를 가둠으로써 갱생의 가능성을 탐문한다. 빈센테이던 시절 베라는 남성적인 악행의 극점에 놓인 강간범이었다. 성전환자들이 이 영화를 보면서 느끼는 불쾌함은 어디서 기원하는가 같은 호기심을 제쳐두고 나는 알모도바르의 태도를 판단할 수 있는 중요한 잣대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있다고 생각한다. 베라는 성을 전환한 여성인가, 아니면 거세된 남성인가? 이성애자 남성으로서 나는 잘 판단하지 못하겠지만, 알모도바르는 전자에서 후자로 이행하는 모양새로 영화의 플롯을 구성하고 있다. 그렇다면 베라 또는 빈센테는 최종적으로 행복에 도달했는가? 이 질문에 답하는 것에 알모도바르의 진의가 있다고 보여진다.
신선한 육체
젠더의 유동성은 스토리를 매력적으로 만들기 위한 빌미일 뿐 <내가 사는 피부>의 본질은 아니다. 차라리 그것은 현 사회 안에서 성전환자의 조건과 환경에 대한 심리적 알레고리로 풀이될 수 있다. 누군가에 의해 자신의 몸이 강제적으로 변형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직후 베라는 목을 그어 삶을 버리려 한다. 베라의 최초 반응은 이 세상에서 트랜스 젠더가 어떻게 조건화되고 있는지를 일러준다. 내가 트랜스 젠더라면 깨끗이 죽어버리겠어! 알모도바르는 이 냉엄한 현실을 시발점으로 하여 베라가 겪게 되는 내면적 변화과정을 따라간다. 신체변형에 대해 베라가 반응하는 추이를 따라가는 스토리는 흥미로운데, 이 대목에서 알모도바르는 흡사 자신을 투사하여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조물주로부터 나쁜 피부를 장착당한 존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베라가 보이는 최초의 반응은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다. 로버트가 수술 직후 베라의 가슴을 쥐고 그 생생한 감촉에 희열을 느끼는 장면에서 베라의 얼굴 위에는 변이된 신체에 적응하지 못한 기색이 역력하다. 표층(피부)에 대한 심층(정신)의 소외. 여기까지 보면 섹슈얼리티의 변형은 자발적인 동기화가 부재한 복수의 행위일 뿐이다. 로버트가 역설하는 생명윤리의 문제로까지 비약할 필요는 없겠지만 빈센테의 베라로의 변이는 신의 저주이다. 이러한 상황은 로버트가 건넨 드레스에 대해 베라가 보이는 반응에서 명확히 표현된다. 침대 위에 널린 꽃무늬 드레스들을 보고 베라는 격분해 드레스를 찢어버린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인 이 순간, 베라가 갈기갈기 찢은 꽃무늬 드레스(베라가 빈센테이던 시절 레즈비언 크리스티나에게 선물하려 한 드레스를 상기시킨다) 조각들이 마루에 흩어진 이미지는 빈센테-베라간의 젠더 투쟁을 이미지화한다. 한 존재 안에 남성과 여성은 나란히 놓여 있다. 이런 특성을 시각화하는 두개의 장면이 있다. 프레임 오른쪽에 소파에 기대어 TV를 보는 베라를, 왼쪽에 발을 뻗고 기대어 있는 로버트를 배치한 이미지의 대칭 구도, 6년 전으로 시간이 플래시백되면서 왼쪽의 베라가 오른쪽의 빈센테로 디졸브될 때의 대칭 구도가 그것의 예시이다. 두개의 얼굴, 두개의 성, 두개의 신체. 강요된 섹슈얼리티에 대한 반응의 첫 단계를 지나자 베라는 현실을 담담히 수용하는 국면으로 진입한다. 반쯤은 체념한 듯 치장을 위해 제공된 아이라인 펜슬로 벽에 일기를 쓰고 요가를 하는 것이다. 요가는 깊숙한 내면으로 침잠하는 명상의 행위인 동시에 숨겨진 자신을 발견하는 동기를 제공한다.
후반부로 치달으면서 베라에게는 이중의 변이가 일어난다. 요가와 글쓰기라는 명상적 퍼포먼스를 통해 그는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자신에게만 속한 지대로 들어간다. 그것은 외피적인 표식인 피부가 아니라 진정한 정체성을 발견하는 순간으로의 이행을 보여준다. 반대의 성으로 신체를 변형하는 행위는 일종의 신성(神聖)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진다. 달리 말해 그것은 창조주의 섭리를 부정하는 나쁜 피부로의 위조이다. 역으로 이러한 전이가 자신의 뜻과 무관하게 창조주에 의해 발생했다면 어찌할 것인가? 상술(上述)한 ‘이중의 변형’이 발생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이다. 창조주에 의한 압제적인 변이, 변이를 부정하고 자발적 의지에 따라 정체성을 재수용하는 과정이 중층적으로 겹쳐 있다. <내가 사는 피부>는 이 이중적 변이의 절합을 보여준다. 결과적으로 베라/빈센테는 신체의 변이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변이에 대한 수용은 로버트의 반인륜적 처벌에 대한 굴복이라기보다 자신의 내면에 있다고 느끼게 되는 단계를 통해 이루어진다. 로버트는 인조 피부를 기워 신체적 변형을 실행하지만 그의 메스는 정신의 영역에까지 도달하지는 못한다. 베라는 창조주를 거스르고 종국에는 그를 살해하며 지난날 자신이 태어난 장소로 돌아가 변형된 아이덴티티를 스스로 확증한다.
변이된 성에 대한 베라의 수용과정은 비단 섹슈얼리티에 한정할 수만은 없다. 피부라는 감옥, 그리고 폭력적으로 신체를 옭아맨 로버트의 요새로부터 해방된 뒤 비로소 우리는 자율적인 의지에 의해 베라가 하는 첫 번째 행위와 만난다. 로버트를 살해하고 연구소를 탈출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났다면 이야기는 더욱 모호해졌을 것인데, 알모도바르는 그가 고향으로 돌아가 한 때 자신이 흠모했던 여인 크리스티나와 재회하도록 만든다. 칼로 목을 그었던 어두운 과거라면 자신의 머리에 총알을 박을 법도 하건만 베라는 나고 자란 존재의 본향으로 돌아간다. 어머니가 운영하는 옷 가게인 그곳은 울긋불긋한 드레스들과 구두, 액세서리들이 여성적 향취를 자아내는 공간이다. 6년 전 레즈비언으로서 정체성을 밝히고 빈센테의 구애를 고사했던 크리스티나는 베라가 되어 귀환한 빈센테를 다시 만난다. 빈센테는 여전히 크리스티나가 매력적이라고 느끼는 것 같고, 두 사람이 비로소 연인이 될 수 있으리라는 희미한 암시를 주면서 이야기는 닫힌다.
신(新)여성공동체의 탄생
유예된 사랑의 완성을 보여주는 이 변화는 무엇을 말하는가? 그 순간 베라는 빈센테로 회귀한다. 그러나 귀향한 빈센테와 과거 빈센테의 차이는 자명하다. 그는 타인을 성적으로 유린하는 불온한 육체가 아니라 갱생의 시간을 통해 여인으로 탈피한 베라-빈센테이다. 게으르고 약에 취해 기억조차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악행을 일삼는 6년 전 철부지 청년이 아니라 신선한 육체로 사함받은 것이다. 남성적 질서하에서 훈육된 포악함에 대한 갱생과 교화의 영화로서 <내가 사는 피부>의 본질은 남자인가 여자인가를 판별하는 성화(性化)된 기준이 아니라 남성성의 소멸에서 여성성의 개화로 이행하는 과정에 있다. 마지막에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딸(베라-빈센테)과 어머니, 레즈비언 친구로 구성된 신(新)여성공동체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감동적인 이 장면을 보면서 나는 불현듯 크리스티나의 입장에서 상황을 상상해보게 되었다. 레즈비언인 자신에게 관심을 보인 한 남자가 6년이 흐른 뒤 자신에게 선물하려 했던 꽃무늬 드레스를 걸치고 여자로 모습을 바꾸어 귀환한 것이다. 피로와 고통으로 점철된 베라-빈센테의 막후 스토리를 헤아릴 길 없는 크리스티나의 입장이라면, 이건 더할 나위 없이 순정한 러브 스토리가 아닐까. 알모도바르는 여기에 성정치학을 들이대고 싶지는 않은 것 같다. 강요된 신체의 감옥에 갇혔던 자아를 발견하는 자의 스토리로서 이보다 더 행복한 결말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