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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구체인 동시에 추상

<고지전>의 애록고지를 보며 지도와 영토에 대해 생각하다

<고지전>

휴전 협상은 2년이 넘도록 지리멸렬한 상태다. 판문점에 모인 북한과 유엔의 대표들은 영토를 조금이라도 더 넓히려고 직접 지도 위에 펜으로 선을 그려가며 기싸움을 벌이고, 동부전선의 병사들은 그 펜이 흔적을 남긴 자리에서 사지가 찢겨나간 채 피를 흘리며 죽어간다. 판문점의 협상과 동부전선의 전황은 그렇게 지도 한장을 사이에 두고 등을 맞대고 있다.

한국전 당시 육군 제1사단의 사단장이었던 백선엽에 따르면 전쟁 발발 직후까지만 해도 전방부대 상당수는 “국민학교 교실의 벽에 걸린 ‘대한민국 전도’”를 펼쳐놓고 작전 계획을 수립했다고 한다. 백선엽은 안면이 있는 미군 연대장과 조우한 뒤에야, 유성펜과 투명지와 함께 새 지도를 손에 쥐게 된다. 전쟁이 일어난 지 보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미군이 그에게 건넨 지도는 식민지 시기 일본이 한국의 지형을 실측해 제작한 5만분의 1 지도였다. 백선엽은 실개천과 샛 96길, 작은 구릉까지 자세히 표시된 이 지도를 들여다보며, “눈이 확 뜨이는 심정”이었다고 토로한다. 하기야 그의 표현대로 “전도로 지형을 읽는 것은 김정호 선생이 만든 대동여지도를 보면서 전쟁을 치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유엔군이 본격적으로 참전하자 상황은 한번 더 바뀐다. 일본이 제작한 흑백 지도가 입체감이 뛰어난 미군의 컬러 지도로 교체되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두 지도 사이의 큰 차이점은 미군 지도에는 세밀하게 좌표가 표시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지원 포격을 요청할 때, 지명을 말하고 거기에서 얼마쯤 떨어진 곳에 쏴달라는 식이었다. 반면, 미군 지도를 받아든 뒤에는 지도에 표시된 좌표의 수치를 불러주는 식이 된다. 지형지물을 정확한 측량을 통해 모사하는 지도에서, 그 위치를 가상의 좌표로 추상화하는 지도로의 변화. 이런 변화 속에서 백선엽은 미군 지도에는 정교한 매개의 층위가 내재해 있다는 사실을 간파한다. 그가 보기에 이 층위는 “첨단의 시야를 지닌 미군의 힘”이 지배하는 현대전의 새로운 차원, 달리 말하면 그들이 작전상황실의 현실과 전장의 현실을 매끄럽게 연결하면서 공중 폭격과 지상 포격을 동원해 압도적인 군사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작전통제권의 차원이었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보자. 전쟁 발발 초기만 해도 참호에서 겁에 질린 채 울고 있던 김수혁(고수)은 3년이 지난 뒤 중위로 진급해 있다. 미군 전투기 편대가 지도 위의 탄착점에 폭탄을 투하하고 지나가면 수혁은 부대원들을 이끌고 폐허가 된 고지를 오른다. 탈환과 퇴각이 끝없이 되풀이되는 애록고지는 철저하게 이원화되어 있다. 그곳은 한편으로는 최신 무기들이 전쟁의 산업화를 실현하는 추상화된 공간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악어부대 장병들이 숙련 노동자처럼 자신에게 할당된 임무를 수행하는 구체적인 장소이다. 수혁과 동료들은 바로 그곳에서 “빨갱이가 아니라 전쟁과 싸우는” 현대적인 인간 병기로 거듭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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