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원과 선동열의 접전. 팽팽한 긴장 속의 <퍼펙트 게임>. 최정원은 80년대 기자로 변신, 이 격전의 분위기를 기록한다. 그녀의 심리변화가 곧 관객의 감동이 되어 돌아오게 해야 하는 중차대한 사명. 감정 메신저인 최정원은 영화에서 작지만 큰 공을 세운 장본인이다. 자연스럽게 녹아든 그녀의 연기에 부쩍 성장한 배우 최정원의 현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참 다행이었다. 최정원을 지금 만나서. 일주일 중, 마침 방송 중인 드라마 <브레인>(KBS2)의 촬영이 없는 하루. 최정원은 여유로워 보였다. 차를 마시고 인터뷰를 하고,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는 오늘이 ‘참 좋다’고 감탄한다. “연기를 하면 그 사람을 닮아가는 것 같아요. 괜히 요즘은 평소에도 말도 착하고 따뜻하게 하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오늘의 최정원은 <브레인>의 ‘감성닥터’ 윤지혜가 돌아보는 <퍼펙트 게임>의 열혈기자 김서형쯤 되는 셈이다. 현장에서 여배우가 까탈 안 부리고 허물없기로 워낙 정평이 나 있는 배우지만, 두 캐릭터를 안고 사는 요즘의 최정원에게선 인간적인 호감이 앞설 정도의 친근감이 느껴진다. “두 캐릭터 모두 연기하면서 행복하겠구나 싶었는데, 아닌 게 아니라 요즘은 부쩍 웃음이 많아졌어요.”
그러고 보니 오랜만이다. 지난해 드라마 <별을 따다줘> 이후 활동이 뜸했는데, 이젠 영화와 드라마, 한꺼번에 두 작품이다. “시나리오는 많이 들어오는데, 좀 멀리보자는 생각을 했어요. 어떤 작품을 할까, 어떤 연기를 할까 머릿속으로 계속 그렸죠.” <퍼펙트 게임>은 최정원이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여겼던 그간의 공백기 끝에 내린 해답이다. 최동원과 선동열의 전설적 게임이 펼쳐지던 1987년 부산 사직구장의 열기. 최정원은 학연과 지연으로 얽혔던 두 라이벌의 접전, 그날의 경기를 묘사하는 영화에서 일종의 ‘관찰자’로 자리한다. “두 선수의 맞대결이 중요하죠. 근데 영화엔 야구에 관심없는 관객도 감동할 수 있는 지점이 필요했어요.” 윤지혜는 정치부에서 갑자기 야구 취재를 발령받은 기자. 야구의 룰도 모르던 그녀가 취재를 통해 두 선수의 열정적 태도에 결국 감화되고 만다. 말하자면 그녀의 역할은 관객을 위한 ‘한 스푼의 감동’이다. 시나리오를 보는 순간, 너무 재밌어서 꼭 하고 싶었다는 그녀. 큰 분량이 아니지만 자신이 해야 할 몫을 확실히 하고자 결심하고 갔다. “앙상블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내 목소리만 내는 게 아니라 작품을 받쳐주기도 하고 빠져주기도 하는 태도 말이죠.” 그녀의 ‘앙상블 이론’은 이미 철저하게 효과가 입증되고 있다. 메디컬 드라마 <브레인>에서 최정원은 극 ‘전체’와 자신이라는 ‘부분’이 어떻게 조화할 수 있나 매회 모범답안을 내놓는 연기로 연일 화제다. 냉철한 의사 이강훈(신하균)과의 러브 라인 사이로, 냉혹한 종합병원의 세계, 그 온도를 0.5도 올려주는 따뜻한 캐릭터 윤지혜가 가진 목적에 딱 부합해서 말이다.
작지만 삭막함을 풀어주는 역할, 전에 없이 인간적인 모습은 분명 단아한 이미지의 최정원에겐 새로운 도전이다. 숨 막히는 프로야구 접전을 펼치는 <퍼펙트 게임>과 이권과 의술이 공존하는 치열한 신경과 병동 <브레인>의 세계. 두 작품 모두 배우들의 폭발하는 연기 없이 한 발짝도 나갈 수 없는, 배우들에겐 이른바 연기 경합의 장. 조승우와 양동근이 혼신을 다해 펼치는 <퍼펙트 게임>과 신하균과 정진영의 에너지가 충돌하는 <브레인>. 최정원의 연기 역시 이 뜨거운 각축전에서 살길을 찾는다. “연기 시작한 지 이제 10년이 넘었어요. 제 특징 중 하나가 영향을 잘 받는다는 거예요. 스펀지같이 잘 빨아들인다고나 할까. 두 작품 하면서 너무 좋은 배우를 만났고, 그분들의 좋은 연기를 보고 흡수할 수 있었어요. 이제 막 연기에 시동이 걸리는 기분이 들더라고요.” <퍼펙트 게임>의 기자를 연기할 땐 실제 80년대 정치부에서 일하던 기자를 만나고, 평소 기자들의 태도를 열심히 관찰하고 응용하기도 했다. <브레인>에선 신경과 의사의 예민함을 보여주려고 4kg을 감량했고, 덕분에 촬영 내내 큰 병원을 뛰어다니다보니 어지럼증이 올 때도 있었다고 한다. “맡은 역할을 할 때는 다른 건 안 보여요. 내가 예뻐 보여야겠다 이런 생각이 아예 없는 거죠.” <퍼펙트 게임>에서 만취 상태에서 낙지를 입에 문 무방비 상태의 모습도, <브레인>에서 부스스한 머리에 편안한 차림의 모습도 모두 그녀의 제안에서 비롯됐다. “연기를 하다보면 인상을 쓰게 되고, 그러다보면 주름도 보이고 그래요. 오죽하면 박희곤 감독님(<퍼펙트 게임>)이 그래도 여배우인데 이런 장면 나가도 되겠냐며 다시 하겠냐고 하시더라고요. 전 연기할 때 눈가 주름이 너무 좋아요. 그게 모두 감정을 나타내는 연기자의 재산 같아요.” 겉모습만 보고 한때 외모의 틀을 깨지 못할 거라는 평도 있었지만, 캐릭터를 자연스럽게 자신의 모습으로 체화한 연기, 두 작품을 훌륭하게 통과해온 지금의 그녀는 그 부분에 오히려 자신있다. “이미지 걱정은 안 해요. 결국 모든 건 다 연기로 풀면 된다고 봐요. 설령 나이가 들어 보여도 연기에 몰입할 수 있는 것, 그런 때 나도 이제 연기자로 성숙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뿌듯하더라고요.”
전도연을 롤모델이라고 했던 건 과거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여배우의 역할이 뜸했던 올 한해지만 그녀는 그게 일종의 사이클일 뿐 기회는 언제든지 올 수 있다고 말한다. “전도연 선배를 연기자로 참 좋아해요. 한 작품의 성공으로 그 이미지에 기대는 대신에 매 작품 항상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잖아요. 저 역시 매번 기존 작품의 이미지를 떨치고 새로운 연기를 보여주고 싶어요.” 최정원은 그래서 다음 작품은 좀더 강한 연기, 카리스마를 내보일 수 있는 작품을 하고 싶다고 한다. “<퍼펙트 게임>이나 <브레인>이나 상대 배우들이 연기하는 걸 보면서 부러웠던 적이 많아요. 센 역할을 할 때의 카타르시스 같은 걸 저도 느껴보고 싶어요. 가끔 그런 연기혼이 끓어오를 때면 쉬는 시간에 혼자 이강훈 선생님(신하균) 대사를 막 해보기도 해요. (웃음)” 그럼에도 한 가지 조건을 잊지 않는다. “연기하면서 어려운 게 너무 모자라지도 과하지도 않아야 한다는 거예요. 적정선을 지키는 게 결국 작품을 보는 관객에게 울림을 전달할 수 있느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핵심이죠.” 드라마를 할 때면 여유있게 작품을 숙고하는 영화의 느린 현장이, 영화를 할 때면 바삐 돌아가는 드라마의 현장감이 주는 묘미가 그립다는 최정원. 지금 그녀는 어느 것이라도 다 해내고 싶고, 다 해낼 수 있는 욕심으로 충만하다. “그런데 작품 끝나면 잠깐이라도 여행은 다녀오고 싶어요. 여행을 아주 좋아하거든요.” <퍼펙트 게임> 촬영으로 모기와 더위와 함께했던 여름과, <브레인> 현장에서 내내 뛰고 서 있는 통에 메디컬 드라마는 ‘체력’이라고 우스갯소리를 하는 그녀. 올해의 수고 끝, 잠깐의 휴식 뒤엔 어떤 최정원이 돌아올지 벌써부터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