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짓는 일은 언제나 어렵다. 한 단어로, 혹은 몇개 단어의 조합으로, 혹은 한 문장으로 전체를 표현해야 한다. 쉬울 리 없다. 글을 다 써놓고 제목 때문에 끙끙댈 때도 많고, 제목이 떠오르지 않아 아예 글을 시작하지 못할 때도 많다. 자신의 작품에 딱 맞아떨어지는 제목을 찾아낸 사람들이 부럽기 짝이 없다. 그 사람들도 제목을 찾아내느라 나처럼 고생했겠지. 수백개의 후보를 떠올렸다가 하나씩 제외하는 과정을 반복했겠지.
제목을 짓는 일에 특별한 재능을 발휘하는 사람도 있긴 하다. 내가 만난 사람 중에는 (전 <한겨레21> <씨네21> 편집장) 고경태 선배가 그랬다. 어떤 글을 쓰든 제목부터 먼저 만들어두는 버릇이 있었지만 한겨레에서 고경태 선배와 일할 때 그 버릇이 사라졌다. 고경태 선배는 내가 쓴 기사를 꼼꼼하게 한번 읽고는 곧바로 제목을 달았는데, 대부분의 제목은 섹시했고, 다양한 방식으로 읽혔고, 서너 가지의 내용을 함축하고 있었으며, 기사의 내용을 관통해서 저 먼 곳까지 뻗어나갔다. 그런 제목을 달아주는 사람이 있는데 내가 굳이 제목을 달 필요가 있나 싶었다. 고경태 선배는 (내가 보기엔 손댈 필요 없이 완벽해 보이는) 제목을 그 뒤에도 여러 번 고쳤다. 조사를 바꾸기도 하고, 어미를 바꿔보기도 하고, 뒤집기도 하고, 말을 줄이고 늘렸다. 특별한 재능에다 끈질긴 노력이 합쳐진 제목이 좋지 않을 리 없었다.
정규 앨범 1집 제목에 그만 반해버렸어
기사의 제목이야 그렇다고 해도 소설의 제목은 내가 지을 수밖에 없는데- 소설의 제목을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는 건 좀 창피한 일이지- 늘 자신이 없고 불안하다. 얼마 전에는 새로 쓸 장편소설의 제목을 열개 정도 적어서 여러 사람에게 보여줘봤는데, 하나같이 선택하는 제목이 달랐다. 제목이 다 고만고만하다는 뜻이겠지.
소설가 김연수씨와 함께 연재한 칼럼 ‘나의 친구 그의 영화’를 책으로 펴내는 과정에서도 나의 제목 짓는 감각의 밑천이 여실히 드러나고 말았다. 김연수씨는 ‘대책 없이 해피엔딩’이라는 제목을 주장했고, 나는 ‘핑퐁 극장’이라는 제목을 고집했다. “야, 대책 없이 해피엔딩이 뭐야, 무슨 그런 이상한 말이 다 있어?”라고 구박을 했는데, 사람들은 ‘대책 없이 해피엔딩’이라는 제목을 훨씬 더 좋아했다. 뒤늦게 안 사실인데 ‘대책 없이 해피엔딩’이라는 말은 내가 쓴 부분에 등장하는 표현이었다. 자신이 쓴 글에서 뽑은 제목에 반대하는 나란 인간은, 정말, 제목 종결자가 될 길이 요원하단 말인가.
최근에 산문집을 펴낼 때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내가 ‘놀이공원에 오신 여러분, 환영합니다’(내가 처음으로 쓴 단편소설의 제목이다)라는 제목이 어떠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더니 편집부에서는 ‘뭐라도 되겠지’라는 제목이 어떠냐고, 역시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뭐라도, 되겠지, 라니, 너무 무책임한 제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뭐라도 되겠지라는 제목 역시 내가 쓴 글에서 뽑은 것이었다) 이내 수긍하고 말았다. 책이 나오자 여기저기에서 제목 좋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긍정의 기운이 넘쳐흐른다면서, 자신의 좌우명과 비슷하다면서(나처럼 대책없이 긍정적인 분들이 참 많으셔!). 만약 ‘놀이공원에 오신 여러분, 환영합니다’라는 제목으로 책이 출간됐다면 어땠을까. ‘핑퐁 극장’이라는 제목으로 책이 출간됐다면 어땠을까. 가끔은 두개의 세계가 공존하는 세상에서 두개의 제목으로 똑같은 책을 출간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다. 결과가 어떻든지 심각한 종이 낭비겠지.
11월 쇼케이스의 뮤지션이 ‘얄개들’로 정해지고 그들의 앨범 제목을 전해 들었을 때 마치 전쟁 때 잃어버린 형제를 만난 기분이었고, 쪼개진 하트의 반쪽을 찾은 기분이었다. 앨범의 제목은 ‘그래, 아무것도 하지 말자’였다. 두개의 제목을 합치면 문장이 완성된다. ‘그래, 뭐라도 되겠지, 아무것도 하지 말자.’ ‘아무것도 하지 말자, 그래, 뭐라도 되겠지.’ 어떻게 합쳐도 어감이 좋다.
얄개들은 최근에 알게 된 그룹인데, 연주가 참 좋다. 듣고 있으면 뉴욕의 한 클럽에 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때로는 구름을 타고 하늘 위를 둥둥 떠다니는 것 같기도 하다. 참으로 또박또박 연주를 하고, 노래는 무덤덤하고 무심하게 잘한다. 음반을 들었을 때 노래들이 각각의 덩어리처럼 느껴졌는데, 쇼케이스 때 얘기를 들어보니 예전의 방식처럼 모든 멤버가 녹음실로 들어가 원 테이크로 녹음한 때문이었다. 어떤 사람은 산울림을 닮았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송골매를 닮았다고 하는 게 그 때문일 거다. 얄개들의 음반을 들어보면 조각조각의 소리를 붙여놓은 게 아니라 하나의 덩어리라는 게 느껴진다. 앨범을 듣고 벨벳 언더그라운드나 루 리드를 떠올린 것도 비슷한 이유 때문이겠지. 하지만 누가 누굴 닮았다고 건네는 말은 위험하다. 얄개들은 누군가의 부분을 닮았을지 모르지만, 누군가의 전체를 닮지는 않았다. 얄개들은 이미 자신만의 독자적인 덩어리를 완성해놓은 그룹이다.
내 머릿속을 활짝 열어주는 연주곡
공연장에서 그들의 음악을 들으면 더욱 놀란다. 이제 막 첫 앨범을 낸 그룹인데, 얼마나 호흡이 좋고 소리가 좋은지 모른다. 각각의 소리가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것 같으면서도 완전히 흩어지지는 않는다. <꿈이냐>와 <2000cc>는 꼭 공연장에서 들어봐야 하는 곡들이다.
내가 음반에서 가장 자주 듣는 곡은 <산책 중에 우연히 마주친 외할머니>라는 연주곡이다. 보컬의 무심한 목소리도 참 좋지만, 목소리가 하나도 없는 <산책 중에 우연히 마주친 외할머니>를 들을 때 내 머리가 더욱 활짝 열린다. 그 곡을 들을 때마다 네 사람이 연주하는 모습과 함께 그들의 머리 위로 펼쳐진 거대한 공간이 느껴진다. 소리들이 하늘로 날아가는 모습이 보이고 저희끼리 서로 얽히는 악기의 소리들이 눈에 보이는 것 같다. 별이 막 쏟아지다가 갑자기 소리들과 부딪쳐서는 불꽃이 튀다가…, 한번 들어보면 내 표현의 의미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제목이 좀 뜬금없긴 하다. 이런 우주적인 사운드에 붙은 제목이 <산책 중에 우연히 마주친 외할머니>라니…. 얄개들에게 물어봐도 대답을 안 해준다. “그냥 외할머니가 좋아서요”라는 뜬금없는 대답이 전부다. 그래서 혼자 상상해본다. 산책 중에 우연히 외할머니를 만난다는 상상을 하면서 음악을 듣는다. 나의 외할머니는 돌아가셨는데, 어쩌나,
생각할 필요도 없이, 상상 속의 외할머니를 생각하면 되니까, (저기 멀리로) 돌아가셨던 외할머니가 갑자기 우리 동네 호수공원 산책길에 나타나 환히 웃으시는데, 외할머니 몸이 기타 소리에 맞춰 하늘로 붕붕 떠올랐다가, 주름진 얼굴로 어리둥절해하시다가 이내 드럼 소리에 맞춰 몸을 흔드시고, 몸뻬는 허공에서 펄럭이고, 나는 외할머니를 올려보면서 고개를 까딱까딱 흔들고 리듬에 맞춰보고, 얄개들의 음악은 절정으로 가면서 기타 소리가 마구 미끄러지다가 갑자기 휙, 모든 게 사라진다. 음악도, 외할머니도, 다 사라지고 없다. 아, 고요하다. 고요한데, 외할머니의 잔영과 기타 소리의 여운은 아주 천천히 공기를 떠돌고 있다. 이게 다른 제목이었다면 또 다른 걸 상상했겠지.
두개의 세계가 공존하는 세상이었다면, 이 음악에다 ‘꽃잔치’나 ‘꿈이냐’나 ‘불구경’ 같은 제목을 붙여보고 다르게 들어볼 수 있을 테지만, 이미 내 속에서 <산책 중에 우연히 마주친 외할머니>라는 곡은 완성되었다. <산책 중에 우연히 마주친 외할머니>가 내게는 너무나 좋은 제목이다. 외할머니, 곧 산책길에서 다시 만나요.
얄개들이라는 이름에 어울리게 때로는 해맑지만, 명징하고 또렷한 소리의 덩어리가 공간을 압도할 때는 장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