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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진의 인디라마] 대중의 의식엔 칼을 대지 못했네

<하얀 정글>의 지나치게 착한 시선에 아쉬움이 남는 이유

송윤희 감독의 <하얀 정글>은 잘 만든 다큐멘터리는 아니다. 본업이 의사인 감독이 사명감을 갖고 만든 영화에 대한 평가가 야박하지만 그렇더라도 할 수 없다. 뭔가 만들다 만 듯한 미진함이 남는다. 좀더 경쾌하게 갈 것인가, 직설적으로 돌파하는 길을 택할 것인가 망설이면서 세련된 완성도를 보여주고 싶은데 방법을 몰라 갈등하는 창작자의 곤혹스러움이 덜커덩거리는 구성을 피해가지 못하게 만든다. 그런데도 보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부모님께 보여드리고 싶은 생각이 든다. 이게 이 영화의 미덕이다.

<하얀 정글>에 찍힌 현실에 따르면 환자를 치료 상대가 아니라 돈벌이의 도구로 대하는 의사나 간호사, 병원 직원들은 매일매일 지속적으로 성과주의의 압력에 시달리고 있다. 당일의 환자, 내원환자 수를 통고하는 휴대폰 문자메시지나 월별 수익통계를 데이터화해 의사들에게 직접적인 압력을 가하는 병원의 영리지향 경영시스템이 의사와 환자를 모두 돈벌이의 도구로 내몬다. 수익에 따라 환자를 평균 30초별로 나눠 속성진료하고 불필요한 검사를 남발하고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는 수술로 유도하는 현재의 병원시스템을 화면으로 보고 있노라면 지금까지 이 땅에 살면서 본인 문제나 가족의 병력 때문에 병원을 다니며 느꼈던 고통을 거울로 비춰 보여주는 기시감 때문에 분노가 치밀어오른다.

모범적이지만 심심한 구성

비인간적인 치료시스템의 원인은 의료를 공공영역으로 다루지 않는 국가정책의 부실 탓이다. 모두 그걸 알지만 그걸 비판하는 게 습관이 되어 있지 않다. 계몽된 지식인이자 해당 분야 종사자인 송윤희 감독은 이걸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풀어낸다. 먼저, 가난하기 때문에 현재의 의료시스템 혜택을 받지 못하는 극빈계층, 대한민국 하위 1%에 속하지 않으면 무료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의 현실을 곁에서 동참한다. 이어서 이들을 무심하게 죽음 직전으로 내모는 현재의 의료시스템의 문제를 병원 내부 공간에 카메라를 비추고 살펴본 다음, 의사와 간호사 병원 직원들의 고해성 인터뷰를 배치한다. 사정이 이런데도 부실한 의료서비스 시스템의 개선 방향을 의료민영화에서 찾으려는 정부 정책 당국자들과 기업의 움직임이 클라이맥스로 편집된다.

모범적인 구성이지만 좀 심심한 구성이기도 하다. 그걸 감독도 염려했는지 마이클 무어의 <식코>를 의식한 꽤 재미있을 법한 시각적 논평이나 개그를 곧잘 끼워넣기도 한다. 물방울이 떨어지는 이미지를 인터컷으로 집어넣어 ‘낙수효과’의 무의미함을 꼬집는다든지, 국회 대정부 질의에서 호언장담하는 경제관료의 모습을 프리즈프레임으로 잡아놓고 희화화한다든지 하는 잔재미를 깔아놓는다. 그것도 나쁘지 않으나 이렇게 해도 될까, 하는 소심함이 느껴져서 관객이 맘 놓고 웃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식코>의 마이클 무어 감독에 비하면 송윤희 감독은 훨씬 착하고 진지하다. 그 자신이 의사로서 겪었을 윤리적 갈등이 화면에 진하게 배어 있고 그건 가난한 이들을 좇는 카메라나 자신들의 도덕적 부채감을 고백하는 의사들의 모습에 투영돼 있다. 한국 의료현실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상당수의 장면들을 전후좌우로 감싸고 있는 것은 이런 감독의 진한 정서적 배색이 들어간 장면들이다.

특히 의사와 병원 직원을 인터뷰하는 장면들에서 감독의 강한 자기 이입 흔적을 느끼게 된다. 영화에 출연한 사람들은 아직 도덕적으로 무너지지 않은, 건강한 자기 회의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들의 고백은 거꾸로 일란성쌍둥이처럼 병원에서 환자를 도구화하는 대다수 의료진에 대한 감정적 질타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돼 있다. 이 일방의 도덕적 입장은 좀 위험하고 모호한 구석이 있다. 물론 잘못된 현실을 걱정하는 이들의 태도는 존경받을 만하다. 문제는 이런 도덕적 각성만으론 해결될 수 없는 현실이다.

병원 종사자들의 고백과 또 다른 쌍을 이루는 저소득층 노약자들의 일상을 다루는 단락도 좀 민감하게 언급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들을 자신의 어머니 아버지처럼 대하고 싶은, 의료현장에서 그러고 싶었으나 카메라를 들고 취재하는 입장으로 바뀐 감독의 진심은 화면을 통해 충분히 전달된다. 다만 이런 인본주의적 태도가 연민과 공감이라는 형태로 제시될 때 역시 시스템의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하는 방향으로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들을 그저 희생자로만 다루는 것이 다큐멘터리의 입체성을 마모시키지는 않는가 의심이 생긴다. 대체로 이런 시선은 그동안 많은 독립다큐멘터리들의 시선이 보여준 정서적 색깔이기도 한데, 이런 데 감정이 애매하게 개입되는 것은 실제로 <하얀 정글>에서는 정확한 균형을 맞추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영화에서 잠깐 다뤄지기도 하는데, 하위 1%에 속하는 극빈층의 할머니가 무상의료진료를 받아 병이 낫고 난 뒤에 다른 곳이 아파도 병원에 쉽게 갈 수 없더라는 고백을 하는 장면이 있다. 감독이 카메라 바깥에서 왜 그러냐고 묻자 그 할머니는 정부한테 미안해서 그렇다고 답한다. 물론 이 장면은 그런 할머니의 순진함, 가난하지만 염치를 아는 착한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동시에 이 부조리한 현실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대다수 사람들의 무지를 증명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감독은 그 점에서 대해서는 언급을 삼간다.

다른 장면에서 또 다른 할머니에게 감독이 의료민영화에 대해 묻는 장면이 나온다. 이 할머니의 반응도 앞서 언급한 할머니의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감독은 우리 다수가 반대하면 그들은 쉽게 민영화사업을 추진하지 못할 것이라고, 이를테면 계몽을 하는데 그 점이 바로 이 영화 <하얀 정글> 전체를 지탱하는 입장일 것이다. 그게 잘못됐다는 게 아니라 (자꾸 비교해서 죄송하지만 이 영화가 분명히 그 영화를 의식하고 있는 듯이 보이기 때문에) <식코> 스타일의 날카롭게 날을 벼린 비판적 풍자다큐멘터리의 정서적 색깔과 비교할 때, 감독이 너무 착해서 그들은 악하고 이쪽은 착하고 순하다는 이분법으로 현실을 재단하는 쪽으로 의식하지 못한 채 흘러가버린 것은 아닌가라는 아쉬움이 남는다는 것이다.

<하얀 정글>의 계몽적 목적이 달성되려면…

나는 이 잘못된 현실을 만든 것은 일차적으로 정부의 책임이 크지만 그런 정부를, 또한 그 정부의 곁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열심히 로비를 하고 있는 기업을 바라보는 대중의 의식에도 큰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탕에 깔려 있어야, 영화에서 참회하고 회의하는 의사들만큼의 책임감을 대중과 관객이 느껴야, <하얀 정글>의 계몽적 목적은 비로소 달성되는 것이 아닐까. 어쩔 수 없이 <하얀 정글>의 카메라는 다소 우월한 입장에서, 달리 말하면 계몽적 후의를 지닌 입장에서 관객을 내려다보는 듯해 보이지만 결국에는 관객을 정면으로 공격해서 항복을 받아내려는 의지와 결기는 없는 상태로 끝난다. 물론 지나친 요구라는 걸 안다. 맨땅에 헤딩하는 식으로 이런 영화를 만들어낸 송윤희 감독은 추후 훨씬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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