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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객잔] 이미지의 힘을 믿다

‘영화’의 재현 방식에 근원적인 개량을 요구하는 <보라>

<보라>는 모사적인 재현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는, 반(反)전통적인 색채가 부각된 다큐멘터리다. 텍스트의 내적 구조는 정교하게 여러 겹을 이루고 있으며 이런 이유 때문에 보편적인 취향의 관객에게는 다소 난삽하거나 생경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노동’이라는 의제를 다룬 여느 영화들과 달리 대상을 다루는 방식이 선동적이지 않고 명상적일 뿐 아니라 이미 주어진 대상에서 이야기와 의미가 파생되는 다큐멘터리의 전형으로부터도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다. 사실의 채록이나 명시, 그에 대한 유, 무형의 논평이라는 다큐멘터리의 소임에 연연치 않으면서 이미지의 본성에 관해 문답하려는 야심은 다큐멘터리와 아방가르드의 점이지대를 서성인다. 그렇게 함으로써 다큐멘터리의 미학이 영화의 신비를 앗아가려 한다는 듯 감독 이강현은 사물이나 현상을 명명하는 것을 포기하고, 그것을 대하는 작자의 태도를 드러내거나 제각각으로 분리된 현상들을 쉽사리 논리가 서지 않는 모호한 체계로 묶어냄으로써 다른 각도에서 재구성하도록 권면한다. 따라서 <보라>는 다큐멘터리라는 틀 속에 한정하기에 적절치 않은 작품이며 폭넓게 ‘영화’의 재현 방식에 근원적인 개량을 요구하는 독창적인 창작물이라 할 것이다.

위의 내용대로라면 <보라>에 착상된 창작의 뿌리는 두 갈래다. 하나는 영화가 다루는 대상, 현대화된 노동의 조건에 대한 간단없는 성찰이며, 또 다른 하나는 대상과 이미지가 맺는 관계를 통해 유추할 수 있는 이미지의 수사학이다. 나는 후자가 전자를 견인하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그것이 따로 떨어진 사건(금속 공장과 마네킹 공장, 채석장, 딸기밭, 컴퓨터 작업장, 사진 강좌, 동호회 활동)의 이종적 결합이라는 이 영화의 형식의 겹을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중심으로부터의 이탈

초·중반까지, 다소 보기에 따분하게 반복되는 장면들(일하는 사람들과 인터뷰)을 쌓아가면서 <보라>는 노동의 세계에 대한 객관적이고 세심한 관점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여기에서 이강현이 몰두하는 것은 ‘중심으로부터의 이탈’이다. 그는 카메라가 기록하는 대상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기보다 대상에 대한 의식을 은근히 드러냄으로써 전망과 태도를 끌어내는 방식을 취한다. 대상에 대한 의식은 대상의 중심성을 거부하며 따라서 그것의 해체, 재구성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중심성(centrality)이라는 개념에 대해 부연이 필요할 것 같은데, 스크린 위의 이미지를 볼 때 관람자는 대개 중심화의 논리에 종속된다. 어떤 인물이 중추적인 액션을 수행하는가, 어떤 사건이 서사의 흐름을 주도하는가에 따라 선택과 배제라는 이미지의 지정학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연출론적으로 보자면 이 중심화의 논리는 중요도에 의해 결정된다. 서사적으로, 의미론적으로, 주제적으로 중요한 인물과 액션, 대사, 사물이 중심성을 부여받고, 중심성이 부여된 인물, 액션, 대사, 사물은 프레임의 전경에, 가운데에, 크게, 돋보이는 방식으로 배치된다. 이와 같은 웅변적인 시각화는 중심성을 확보하는 관습화된 방법론이었으나 <보라>는 이 중심화의 논리를 해체하려 든다.

이를 예증하는 장면들을 보자. 영화는 작업환경을 측정하고 사업장의 건강검진 실태를 조사하기 위해 방문한 젊은 여성 보건의가 낡은 관리사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으로 시작한다. 반기는 기색이 전혀 없는 냉랭한 사무실에서 직원 둘(여직원 하나는 대화에 가담하기를 꺼린다)과 대화를 나누는 그녀의 모습을 카메라는 멀찍이서 응시한다. 휑뎅그렁한 사무실 전경을 넓은 화각으로 잡는 카메라에서는 대화의 중심으로 들어갈 뜻이 없다는 듯한 방관의 태도가 역력하다. 이어서 귀청을 찢을 것 같은 금속성 소음과 기계에서 뿜어져 나오는 굉음들, 매캐한 분진이 흩날리며 오감을 압도하는 공장 내부의 기나긴 파노라마 숏이 이어진다. 다음 숏은 다시 관리사무실로 돌아와 조금 전 보건의에게 조사를 받던 관리자가 동료와 함께 부부싸움을 주제로 기이한 한담을 나눈다. 대화는 장황하나 대화의 내용은 요점을 한참 벗어나 있다. 관리사무실에서의 썰렁한 실태조사, 한갓진 대화와 육중한 고통이 느껴지는 노동현장을 대비시키는 이 두서없는 오프닝 시퀀스는 금속 공장과 마네킹 공장, 채석장, 딸기밭, 컴퓨터 작업장을 횡단하게 되는 긴 여행의 시작이다. 그것은 기대하지 않았던 연결점들을 뜨개질하고 점점 더 의미를 알 수 없는 지대로 비약하며, 후반부에는 여담으로 흘러버리는 목표를 상실한 여행으로 귀결된다.

신들간의 몽타주로 볼 수 있는 <보라>의 오프닝은 다음과 같은 영화의 아이디어를 요약한다. 탐사는 두 가지 경로로 진행될 것인데, 보건의들에 의해 수행되는 의학적인 탐사와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복합적 노동조건의 목록을 훑어가는 이중의 탐사이다. 중심 흐름은 첫 번째에서 두 번째 탐사로 차츰 옮아갈 것이며, 거기에는 이미지의 수사학이 중요하게 작용할 것이다. 주의 깊은 관찰자들은 눈치를 챘겠지만, 현장을 탐사하는 카메라는 중심이 되는 액션이나 인물을 초점화하지 않고 그 사이 또는 둘레를 맴돈다. 거의 예외없이 피사체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카메라는 대상의 심부로 들어가지 않는다. 의식의 흐름을 좇는 것처럼 시간이 흐를수록 카메라의 위치는 점진적으로 변화한다. 촬영과 편집은 탐사자들의 액션에 따라 동기화되지 않으며, 따라서 핵심 이벤트에 대한 웅변적 시각화나 면밀한 중심화에 태만하다. 초반부 보건의들의 현장 방문이 시작되었을 때 카메라는 그들의 발길을 좇고 노동자들을 인터뷰할 때도 대화 내용을 충실하게 수록하지만 탐사가 거듭될수록 중심 사건으로부터 이탈한다.

카메라(시선)의 탈중심화 또는 탈맥락화는 초두부터 말미까지 유지되는데, 카메라가 놓인 장소와 이동의 방식은 이 영화를 열고 비틀고 완성한다. 보건의, 노동자, 노동의 장소, 인터뷰 대상자들을 프레임 내 외딴 가장자리 또는 구석으로 밀쳐내고 액션이나 대화를 벗어나 주변을 배회하는 카메라의 잠행이 본격화되면서 다른 이야기의 결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보건의들이 한 장소를 떠나 다른 곳으로 이동했을 때에도 카메라는 그들을 좇지 않고 이전 장소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비추거나 조사와 대화가 이루어지는 장소를 등한시하고 바깥의 노동자나 기계를 비춘다. 인상적인 몇 장면이 있다. 실태조사 인터뷰에 응하기를 강권하는 동료의 제안을 한사코 거절하는 한 노동자를 보여주는 신에서 카메라는 작업의 위험요소에 대해 설명하는 동료의 인터뷰 모습을 프레임 왼쪽 귀퉁이에 소외시킨 채 묵묵히 작업에 몰두하는 노동자의 모습을 프레임 가운데에 놓는다. 중년의 노동자가 사무실에서 몸을 드러내놓고 진찰을 받으며 의사가 캠코더로 환부를 촬영하는 장면에서도 카메라는 관찰의 대상에 잠시 머물다가 슬금슬금 옆으로 이동해 의자에 일렬로 앉아 대기하고 있는 동료 노동자들의 모습을 비춘다. 처음에는 프레임 오른쪽에 노동자가 배치되지만 카메라가 이동하면서 그는 프레임 바깥으로 밀려난다. 조화와 균형이 심각하게 훼손된 중심화의 의도적인 회피가 거듭될수록 우리는 부득이 이 작품을 받치고 있는 탈중심화의 의미를 되살필 수밖에 없다.

노동자들의 험악한 노동조건을 기록하고 그들을 인터뷰하는 것으로부터 추출되는 내용의 골격은 <보라>의 진의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것이 별로 없다. 차라리 지속적으로 주의를 환기하는 공장 주변을 서성이는 카메라의 위치, 프레임의 안과 바깥을 오가는 시선의 이동, 보건관리에 대한 실태기록이라는 핵심 사건이 이종적인 사건들과 연결되는 접점이다. 여기서 ‘보라’라고 하는 표제에 담긴 웅숭깊은 의미, 보기(seeing)의 방식에 대한 작자의 태도와 중구난방으로 보이는 텍스트의 겹구조가 모습을 드러낸다.

<보라>는 재현의 양식을 어떤 각도에서 달리 사고하는가? 아니, 그 특질과 관련하여 영화 이미지의 본성은 노동의 세계를 기록하는 이 영화의 수사학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이것이 해명될 때 비로소 우리는 <보라>의 이야기(다큐멘터리에도 아방가르드에도 이야기가 있다) 기술 방식, 위에서 말했듯 어떤 중심된 대상이나 의제를 따라 일목요연하게 그려지는 중앙집권적 서술을 의식적으로 거부한 채 다소 무질서하게 보이는 복합 구성을 택한 연출의 작의에 대한 답을 내놓을 수 있을 것이다.

중노동이 일반화된 노동현장의 실상을 기록하려는 의도를 버리면서부터 <보라>는 통일적인 의제나 이야기의 완결성보다 현대사회에서 다성화된 노동의 면모를 모자이크처럼 구성하기 시작한다. 하나의 중심 화제를 좇아가는 종래의 영화읽기를 당혹스럽게 만드는 이 영화의 구성적 미학 안에는 무정부주의자의 소행으로 치부할 요소들이 다분하다. 다큐멘터리든 극영화든, 중앙집권적인 미학이라는 견지에서 보자면 그것이 무정부주의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보라>에서 이강현이 다루는 것은 넓은 의미에서 ‘노동’이다. 인간과 기계의 충돌이 가공할 통증을 유발하는 공장과 채석장, 농촌의 일터, 인터넷 데이터베이스 센터, 하드 디스크를 수리하는 어두컴컴한 작업실을 횡단하면서 형태는 다르지만 삶을 영위하기 위한 현장을 스케치한다. 노동을 통해 인간의 육체에 가해지는 훼손과 마모의 흔적들을 따라가는 카메라는 세심함과 꼼꼼함을 가지고 그것을 기록하지만 고통을 스펙터클화하는 오류를 피해가려는 윤리적 태도를 잊지 않고 있다. 중심에서 이탈한 채 주위를 배회하는 제스처를 취하는 카메라에서 감지되는 느낌은 어떤 망설임과 두려움인데, 두려움을 끝까지 주파한다면 그것은 완전히 새로운 미학적 태도가 될 수 있다는 걸 이 영화는 보여준다.

그렇다면 노동을 대하는 작자의 이런 태도와 영화 이미지 사이에 어떤 관련성이 있는가? 그것은 노동의 지표화라는 개념을 빌려 설명할 수 있다. <보라>는 보건관리 실태에 대한 조사를 따라가지만 궁극적으로는 노동이라는 활동을 통해 유발되는 인간의 고통이 계량화된 지표로 환산되고 그것이 성문화된 조항들에 의해 해결될 수 있다고 사고하는 허황한 믿음의 메커니즘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않는다. 따라서 보건의들의 탐사작업을 거쳐 수립되는 이 노동의 지표화를 좇는 카메라의 지배적인 정조는 권태와 무력감일 수밖에 없다. 위에서 지적한 대로 카메라가 부단히 중심에서 이탈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필경 이와 같은 시선의 투영이다. 계량화된 데이터는 명확한 것 같지만 하나의 대상과 현상에 대해 실체적인 의미에까지 도달하지 못한다. 계량화된 고통의 지표는 현장의 문제들에 대한 편리한 해결책을 주겠지만 실질적인 해법은 아니다. 따라서 산업보건의 선임이나 보건관리 위탁을 명시한 법조문, 깨알 같은 자막으로 나열되는 유해인자들에 대한 규정(자막으로 표기되는 이 내용들은 다큐멘터리가 추구하는 교양적 정보로서 무가치하다), 분진 차단을 위한 보호구와 마스크에 대한 설명은 죄 공허하다. 그것은 산뜻한 해법인 것처럼 자명해 보이지만 실효적 해결을 보장해주지 않는 문구에 불과하다. <보라>에서 이강현이 표현하려는 것은 이처럼 명시적인 규정과 손쉬운 지표로 환원되지 않는 모호한 현실 사이에 놓인 긴장인데, 이러한 긴장은 영화 이미지의 속성과 곧바로 연결된다. 영화의 후반부를 채우는 사진 동호회의 취미활동이 맥락을 획득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고통을 시각화하는 이미지-지표

이미지의 역사에서 사진은 보이지 않는 대상을 표현하는 능력으로 인해 혁신적인 매체로 등장할 수 있었다. 사진 이미지는 대상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과의 등가성을 신호하는 지표가 된다. 영화 중간에 삽입된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사진 강좌에서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강사는 “바람을 사진으로 찍을 수 있는가?”를 묻는다. 이어지는 대답에서 그는 “바람 그 자체를 찍을 수는 없지만 바람을 표현할 수는 있다”고 말한다. 바람에 나부끼는 보리밭,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통해 바람이 표현된다는 것이다. 흔들리는 나뭇가지는 바람이 아니지만, 바람을 표현하는 지표(index)다. 사진 이미지(흔들리는 나무)는 대상(바람)과 존재론적 동일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직접적으로 대상을 지시하기보다 그것에 내재한 속성의 간접적인 재현 또는 그 흔적이라는 점에서 이미지는 지표적 신뢰성을 얻는다. <보라>에서 카메라가 뒤를 밟아 구성해내는 것도 이러한 흔적들이다. 노동을 통해 유발되는 통증은 사진 강좌의 강사가 예시한 바람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대상이다. 그럼에도 분명한 사실은 그것이 비가시적이지만 생생한 물성(物性)을 가진다는 점이다. 바람이나 통증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는 그것을 생생하게 감각할 수 있다. 통증을 규정하는 조항들과 실제 노동자들이 겪는 고통의 인상을 대비시키는 오프닝의 몽타주는 이러한 차이를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보라>의 진정한 주제는 이 측정될 수 없고 언어화될 수 없는 허깨비인 동시에 너무도 생생하게 감각화할 수 있는 대상(영문 제목이 말하는 고통 또는 통증)의 이미지화라고 할 것이다.

비가시적 대상을 표상하는 것이 가능한가를 문답하는 영화로서 <보라>는 이미지의 힘에 대한 신뢰를 보여준다. 고통을 지표화한 법조문이 지니는 자명성, 그러나 실체에 도달하지 못하는 무력에 비해 이미지-지표의 힘은 신실하다. 이것이 언어적 지표와 시각적 지표의 차이이다. 적어도 이미지는 쉽게 정의되지 않는 인간과 삶의 특질을 일률적인 조항으로 치환하지 않는다. <보라>의 혁신성 또한 이처럼 보이지 않는 것을 표현하는 영화의 권능, 통감각적인 묘사의 가능성을 그 안에 탑재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날카롭고 냉정해 보이는 이 영화에는 말이 없는 고통의 시각화, 삶을 향한 애달픈 운동의 흔적이 있다. 가장 이상해 보이는 장면들, 이를테면 차가운 서버의 숲에서 원더걸스의 <노바디>를 흥얼거리는 청년에게, 흙먼지 날리는 운동장에서 야구공을 줍는 소년들에게, 사력을 다해 앞으로 나아가려는 수영장의 장애인에게 그런 흔적들이 서려 있다. 이들 장면이 절실해 보이는 것은 그 과정의 구체성을 작품이 감각의 전체를 통해 실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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