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에 대항해 똘똘 뭉쳐 거세게 저항하는 염소 떼가 있었다. 상황을 전해 들은 늙고 경험 많은 잿빛 늑대는 흰 염소와 검은 염소 중 수가 적은 흰 염소만을 쫓으라고 한다. 늑대들은 수가 적은 흰 염소만 잡으려고 평소보다 더 힘을 써야 했다. 하지만 몇번 더 같은 패턴이 반복되자, 검은 염소들이 방어선에서 빠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늑대에 잡아먹히는 흰 염소의 수가 늘었다. 흰 염소들은 검은 염소들에게 따졌다. 왜 같이 싸워주지 않는가. 검은 염소들은 되레, 자신들이 쫓기지 않는데도 싸워준 것에 고마워해야 한다고 맞선다. 흰 염소들이 고마움을 모른다고, 너희들만 공격받으니 스스로 싸워 살아남으라고. 바로 옆에 검은 염소가 있어도 흰 염소만 쫓기는 상황. 결국 흰 염소는 모두 잡아먹혔다. 늑대들은 다시 늙은 잿빛 늑대에게 어찌할까를 물었다. “이제 아무 염소나 내키는 대로 잡아도 된다네. 이제 검은 염소들은 한 마리가 잡아먹히면 그놈이 왜 잡아먹혔는지 알아내느라 대항할 생각을 못할 거야. 뿔이 굽어서 먹혔는지, 다리가 짧아서 먹혔는지, 암놈이라서, 아니면 수놈이라서 먹혔는지 머리를 싸매고 고민을 하겠지. 스스로 먹힐 만한 이유가 있어서 잡아먹히는 거라고 여기는 놈들을 사냥하는 건 식은 죽 먹기지.”
최규석의 <지금은 없는 이야기>는 우화다. <습지생태보고서>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울기엔 좀 애매한> 같은 그의 작품들을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이 권선징악의 분홍색 낙관주의를 전파하지 않으리라는 점을 눈치채리라. 이 책에는 금쪽같은 작가의 말이 실려 있다. “요새 떠도는 이야기들에 따르면 고통조차 웃으며 견뎌야 한다. 아니 애초에 고통을 고통으로 받아들여서도 안된다. 고통을 고통이라 여기는 부정적 태도를 갖는 순간 우주의 에너지는 당신을 못 보고 지나칠 것이다. 그리고 성공과 실패에 대한 모든 책임은 오직 개인에게 있다.” 이런 세상에 딴죽을 거는 책들이 두껍고 복잡해서 써먹어야 할 때 기억이 안 나고, 결정적으로 잘 안 팔린다는 게 이 책을 만들게 된 이유라고 한다. 교훈적인 우화들에 맞서는, 미담에 맞서는 우화. ‘오르지 못할 나무를 찍는 열번의 도끼질 같은 이야기.’
그러니 이 책에 실린 우화들이 하나같이 2011년 11월 대한민국 일간지의 정치면, 사회면의 그림자처럼 느껴지는 일은 놀랍지 않다. 세계적으로 망해가는 자본주의에 길들어 꿈을 잊은 채 일의 쳇바퀴에 떠밀려 살아가는 삶을 풍자한 어느 사냥꾼 이야기와 긍정의 힘을 믿었다가 평생 비명 한번 못 지르고 불행만을 전전한 어느 소년 이야기 등 총 20여편의 우화가 실렸다. 뛰어난 싱어송라이터가 노래를 완성해가듯 그림과 글의 균형이 절묘한, 그야말로 최규석만이 할 수 있는 작업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