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아주 세다. 어쩌면 황당하다. 정필원 작가의 네이버 웹툰 <지상 최악의 소년>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을 뽑는 대회에서 우승한 이현이라는 소년이 신에게 지구 멸망을 요구하면서 시작한다. 이현의 소원을 들은 신은 조금 망설인다. 인터넷 용어로만 인간과 대화를 하는 신은 잠시 ‘…’라는 텍스트를 보여주며 고민하더니 이내 ‘ㅇㅋ’라고 답한다. 단 조건이 있다. 지구 멸망까지 100일의 시간을 준다. 이현은 단 한번 자신의 소원을 번복할 수 있다. 신은 지구 멸망을 막기 위해 오덕희라는 불행 전문 만화가를 이현의 학교에 선생님으로 위장 취업시킨다. 그리고 그녀에게 뱀파이어, 악마, 천사, 마술사, 구미호 등 12사도와 함께 불행한 소년 이현을 행복하게 만들라고 명한다.
<지상 최악의 소년>은 우연히 버스를 타고 가던 작가가 문득 스스로 불행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시작됐다. ‘나 지금 좀 불행한 것 같아, 지구상에서 불행한 정도로는 몇등일까, 누군가 1등이 있을 텐데, 대회가 있다면 1등의 소원을 들어줘야 할 거고, 그 소원이 돈은 아닐 것 같고, 지구 멸망일 수 있겠다.’ 정필원 작가의 생각은 꼬리의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지상 최악의 소년>이 탄생했다.
긴 머리카락으로 눈을 가리고 말 한마디 하지 않는 소년 이현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지상 최악의 소년>은 이른바 하이브리드 스쿨 판타지 액션 활극이다. 화끈한 액션물이 되었다가 눈물을 쏙 빼는 드라마가 되기도 하고 미소년, 미소녀가 등장하는 상큼한 학원물이 되기도 한다. 하나의 장르로 구별짓기 어려운 <지상 최악의 소년>은 가족을 테마로 독자의 눈물샘을 자극했던 작가의 전작 <마음이 만든 것> <패밀리 맨>과는 그 느낌이 사뭇 달라 보인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가족이라는 테마가 여전히 작동한다. “가족이라는 테마를 염두에 두고 <지상 최악의 소년>을 시작했다기보다는 하다보니 그렇게 돼버렸어요. 우스갯소리로 주변 작가들이 ‘또 엄마 나오냐?’ 그러더라고요. (웃음)” 물론 전작과의 차별점도 있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오타쿠 문화를 작품에 적극 반영하는 것이다. “특정 작품의 어느 장면을 패러디하지는 않았지만 예를 들면 이현을 행복하게 하기 위한 ‘열혈’과 ‘하렘’ 작전이 등장하잖아요. 이런 건 만화에서만 특성화된 장르라고 볼 수 있죠. 12사도 중 몇몇 캐릭터는 만화에서만 통용되는 캐릭터를 따온 것이기도 하고요. 전반적으로 애니메이션이나 만화에서 특징적으로 쓰이는 요소를 차용한 경우가 많아요.”
<지상 최악의 소년>은 개그 요소도 불거리지만 무엇보다 작가의 뛰어난 연출력이 작품에 몰입도를 높인다. 스크롤을 내리는 긴장감이 있다는 말이다. 특히 이현의 과거를 알 수 있는 <미아(迷兒)>편은 작가의 장기를 마음껏 발휘한 결과물이다. <신의 낙서>편에서는 컷의 구성이나 프레임을 넘나드는 독창적인 연출력을 볼 수 있다. 정필원 작가는 “‘만화 연출은 가장 적은 컷으로 가장 많은 이야기를 하는 게 기본’이라는 <아키라>의 원작자 오토모 가쓰히로의 말을 항상 생각한다”고 말한다. 출판 형태로 작업하고 웹툰 형태로 재편집하는 <지상 최악의 소년>은 스크롤이라는 동적인 움직임에 맞게 애니메이션적 효과를 적절히 활용하며 독자들의 시선을 모니터에 고정시킨다.
지구 멸망까지 35일 남은 현 시점부터 <지상 최악의 소년>은 점점 스케일이 커질 것 같다. 어쩌면 지금부터 <지상 최악의 소년>의 진짜가 시작된다. 뛰어난 그림 실력과 연출력으로 가족의 감수성을 절묘하게 요리하는 정필원 작가의 재능이 제대로 발휘될 시점이다. 그래서 더욱 기대가 된다. 이 황당한 지구 멸망 시나리오는 어떻게 끝이 날 것인가. 궁금하다면 지금 바로 정주행을 시작하라.
정필원은 만화계의 서태지?
정필원 작가는 고등학생 때 학교를 그만두려고 했다. 이유는? 서태지 때문이다. “서태지가 학교를 중퇴했잖아요. 어떤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닌데 ‘나는 만화계의 서태지가 되겠어’라고 자연스레 마음을 먹고 자습서나 참고서를 다 팔았어요. 학교를 그만두려고요. 어머니가 어떻게 이 사실을 알고는 방에 있던 제 만화책을 다 마루로 내놨더라고요. 만화가는 절대 안된다고 하시면서요. 그래서 가출을 했어요. 사실 가출이라고 하기에는 민망한 게 동네 한 바퀴 돌고 집으로 왔거든요. (웃음) 집에 돌아왔을 때 문 앞에 어머니가 서 계시더라고요. 그때 타협을 했어요. 만화를 하되 대학은 가라고요. 그렇게 해서 세종대학교 만화애니메이션학과에 진학했어요. 대학 3학년 때였는데 마침 웹툰이 시작될 때였어요. 만약에 제가 잡지에 만화를 연재했으면 순정만화를 했을 것 같아요. 소년지랑은 제 성향이 안 맞더라고요. 웹툰은 소년지의 느낌은 아닌 것 같았어요. 그래서 단편을 올렸고 연재 제의를 받게 되면서 웹툰을 하게 됐죠. 만화계의 서태지가 되어야 하는데….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