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기보 읽기를 굳이 배운 적이 있었다. 이창호 9단의 기보에 대한 해석을 읽다가 ‘검고 뭉툭한 선(線)’이라는 표현을 만났는데, 바둑의 기보가 미적으로 읽힐 수 있음에 충격을 받아서였다. 지금은 안다. 뛰어난 선수나 감독의 야구를 보면, 축구를 보면, 장인이 담근 술 한잔을 마시면, 한평생 가족을 먹인 할머니의 밥 한 그릇을 먹어보면… 그 안에 다 우주가 깃들어 있다. 그 안에 시가 있고 음악이 있다. <고양이를 안고 코끼리와 헤엄치다>에서는 체스의 기보 안에 숨은 우주를 발견한 한 소년이 주인공이다.
소년은 태어나면서부터 입술이 붙어 있었다. 탯줄을 자르자마자 수술대 위에 누워야 했던 그는, 절개한 입술 피부에 다리 살을 이식해 붙여야 했는데, 성장하면서 입술의 그 부분에 솜털이 난다. 그는 상상 속의 친구 둘을 사귀는데, 하나는 코끼리 인디라로, 새끼 코끼리던 때 백화점 지붕에서 전시되었으나 몸집이 너무 커지는 바람에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다른 하나는 좁은 틈새에 끼여 빠져나오지 못한 소녀 미라다. 몸집이 커지는 것에 대한 소년의 두려움은 몸집이 비대한 남자에게서 체스를 배우면서 극대화된다. 체스 마스터가 심장마비로 죽은 이후 소년은 신체적 성장을 계속하기를 멈추고, 그런 장점을 활용해 자동 체스 인형 ‘리틀 알레힌’에 들어가 체스를 두는 사람이 된다. 그는 마술사 조수 출신인 기보 기록원에게 미라라는 이름을 붙여주는데, 그가 두고 미라가 기록한 기보는 그 자체가 시(詩)다.
체스. 나무로 만든 왕을 쓰러뜨리는 게임, 8×8 모눈의 바다. <고양이를 안고 코끼리와 헤엄치다>의 체스는 매번 새로운 기보를 악보로 남기는 지고의 언어다. “상대방이 강하면 강할수록 지금까지 경험해본 적이 없는 멋진 시를 만날 가능성이 높아지는 거다.” “철학, 정서, 교양, 품성, 자아, 욕망, 기억, 미래, 좌우지간 전부다. 감출 수가 없어. 체스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암시하는 거울인 거다.” “마스터의 등은 소년에게 승부가 난 뒤의 체스판을 생각나게 했다. 치열했던 싸움의 기억이 사라지고, 많은 말이 모습을 감추고, 얼마 안되는 남은 말도 바야흐로 사명을 다하고, 그저 서글픈 공동만이 펼쳐진 체스판. 체스는 격렬하게 시작해서 쓸쓸하게 끝난다. 흡사 마스터의 등처럼.” 승리하는 기보가 아니라 아름다운 기보를 남기는 일을 목표로 하는 소년의 이야기는 아득한 애잔함을 느끼게 한다. <임신 캘린더> <박사가 사랑한 수식>의 오가와 요코는 그 쓸쓸함의 정서를 슬프지만은 않게 그려내기 위해, 소년의 이야기에서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 이름 같은 정보를 정성껏 지워냈다. 대상은 모호하게, 정서는 또렷하게. 책을 읽는 내내 체스를 둘 줄 모르는 내 귀에도, 아름답게 노래하는 시가 울렸다. 나는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