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량한 벌판 한가운데 낡은 집이 하나 서 있다. 캐릭터와 스토리를 만들어가는 보이스 오버가 흐르자 문을 열고 하나둘씩 사람들이 나와 그 스토리대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스타 영화감독 모재원(이환)과 제작자다. 재원은 통속극의 진부한 레퍼토리를 읊어대면서도 그것을 ‘리얼리티’라 주장하며 으스댄다. 잠시 뒤, 화면은 재원과 그의 보조작가 이수연(김수현)이 갈등하고 있는 또 다른 리얼리티로 옮아간다. 신춘문예 출신의 서른살 수연은 요양원에 입원한 아버지와 고등학생 남동생을 둔 가장이다. 그녀는 깊이있는 작품을 쓰고 싶지만 생계를 위해 적성에도 맞지 않는 감독 뒤치다꺼리를 하고 있다. 재원은 수연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이를 위악적으로 발산하며 그녀를 괴롭힌다. 갈등이 고조되자 수연은 잠시 휴가를 얻고, 그 하루 동안 그녀는 고달픈 현실에 거듭 주저앉고 만다.
<캐릭터>는 수연과 재원이 함께 만들고 있는 영화의 내용과 이들 두 사람의 실제 삶을 나란히 놓으며 대비한다. 마치 부조리극을 연상시키는 여러 줄기의 에피소드들이 수연을 중심으로 엮이는데, 이 가운데 인물이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는 정지화면, 연극 무대를 패러디한 시퀀스, 심리를 대리하는 생경한 이미지 등 다양한 형식들이 시도된다. ‘캐릭터’라는 키워드는 영화의 주제를 드러내는 효과적인 장치로 쓰인다. 그것은 허구와 현실의 인물을 긴밀히 소통시키기도 하고, 때로는 현실의 부조리한 일면을 폭로하며 허구와 현실의 관계를 전치시키기도 한다. 1인2역을 한 주연배우들의 연기도 좋다. 특히 폭발 직전의 감정을 쓸쓸히 삼켜내는 수연의 연기가 돋보인다. 안정적인 보이스 오버 톤도 다소 실험적인 화면을 편안히 받아들이도록 만든다. 그러나 인서트를 남발하고, 클럽신처럼 상투적인 설정으로 인물의 혼란을 설명하려 한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독립운동 사진의 경우, 무명의 얼굴들을 통해서 정형화된 캐릭터의 세계에 반전을 꾀한 듯하나 그다지 설득력있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캐릭터>에는 이상의 시 <꽃나무>가 등장한다. 꽃나무가 내는 외롭고도 “이상스러운 흉내”, 그 절망과 슬픔이 주인공 수연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정해진 틀 속에서 타협의 어지러운 줄타기를 이어가야 하는 모든 예술적 고심과도 통한다. <캐릭터>는 감독의 자기 반영이 두드러진 작품이다. 수연은 좌절 속에서 자신이 만들었던 캐릭터에게 전화를 건다. 그리고 그 캐릭터가 갑갑한 캐릭터의 집을 박차고 나와 갈대밭으로 나아가는 장면에 이르면, 어쩌면 영화 <캐릭터>는 감독이 스스로에게 주는 위로이자 다짐이기도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