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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톡] 세상의 모든 ‘돼지’들을 위한 수다
이후경(영화평론가) 사진 최성열 2011-11-15

<씨네21>과 CJ CGV 무비꼴라쥬가 함께하는 시네마톡: <돼지의 왕>

연상호 감독의 <돼지의 왕>은 서늘한 도시의 밤하늘을 비추며 끝나버렸다. “충격적이었다. 잠이 오지 않을 정도로.” 극중에서 종석의 목소리를 연기한 양익준 감독이 시나리오를 읽고 나서 느꼈던 감정을 전했다. 영화의 끔찍한 엔딩을 확인한 관객도 그 말에 모두 동의하는 분위기였다. 11월9일 오후 7시 CGV대학로에서 <씨네21>과 CGV무비꼴라쥬가 함께하는 열한 번째 시네마톡이 열렸다. 김영진 평론가와 <씨네21>의 강병진 기자가 진행하고 연상호 감독, 목소리 출연한 양익준 감독과 배우 오정세가 참여한 이번 행사는 돼지들의, 돼지들에 의한, 돼지들을 위한 수다였다. <돼지의 왕>은 중학 1학년생들의 교실을 배경으로 힘있는 아이들과 힘없는 아이들 사이의 권력관계를 투박하지만 날카롭게 그려낸 애니메이션이다. 중학생들의 사회에서 종석(양익준)과 경민(오정세)은 ‘돼지’고 강민(조영빈)은 ‘개’다. 경민은 자신의 아랫도리를 마음대로 주물럭거리는 강민의 손길을 용감하게 뿌리치지 못하고, 종석은 그런 경민을 대신해 주먹을 날리지 못한다. 강민은 부잣집 아들에 우등생인 ‘선도’부이지만, 자신들은 그 아래서 선도를 당해야 하는 가난하고 공부 못하는 돼지들이기 때문이다. 그들 앞에 철이(김혜나)가 나타난다. 악을 이기려면 더 센 악이 돼야 한다고 말하는 철이를 종석과 경민은 구세주처럼 여긴다. 하지만 지리멸렬한 현실로부터의 탈출구는 쉽사리 찾아지지 않는다. 그들은 때로는 악으로, 때로는 비열함으로 버틸 따름이다. <돼지의 왕>은 권력을 쥔 개들이 군림하는 세상에서 나약한 돼지들이 버티는 방식을 차가운 시선으로 보여주는 영화다.

분노의 힘으로 통과해온 시대

동시에 <돼지의 왕>은 매우 뜨거운 영화다. 김영진 평론가는 “요즘 젊은 감독들이 만든 영화에 풀기가 없어 아쉬웠는데 간만에 분노의 ‘스리쿠션’을 봐서 통쾌했다”는 말로 <돼지의 왕>과 같은 독립애니메이션의 등장을 반겼다. 그에 연상호 감독은 개인적인 경험을 한껏 끌어들여 “분노의 힘으로 통과해온 시대를, 그리고 그 시대로부터 멀리 오지 못한 지금 이 시대를 환기시키고 싶었다”는 뜻을 밝혔다. “영화 속 게스 바지 에피소드는 중학생 때 같은 반 친구 얘기다. 착한 사람 콤플렉스가 있었던 나는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는 편이었는데, 그 친구가 바지가 찢긴 날 학교 앞에서 ‘상호야!’ 하고 나를 부르는 거다. 모른 척했다. 나중에 그 친구가 ‘새끼들, 다 똑같아’라고 말하더라. 그 말이 마음에 많이 남았다. 근데 그런 경험들이 지금의 현실에서도 (정치적인) 판단을 내릴 때 도움이 되는 것 같다.” 한 관객은 “선생님들을 교내폭력을 묵인해주는 사람들로 그린 이유”를 묻기도 했다. 연상호 감독의 입장은 확실했다. “선생님이라는 존재를 무기력한 존재로 그리고 싶었다. 특히 가라오케 장면에서 그들이 병풍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병풍인 척한다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 사회적으로 비유하자면 지금의 사법부도 마찬가지란 생각이다. 한진중공업 크레인 근처에 전경이 쫙 깔려 있는 걸 보면 <돼지의 왕>은 너무 약하게 만든 영화인 것 같다. (웃음)”

연상호 감독과 비슷한 나이의 양익준 감독도 공포정치에 억눌렸던 시대를 뒤돌아봤다. “군사독재 시절 나는 정치신념이 덜 선 중학생이었지만 폭력적인 시대적 분위기는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주변의 춤꾼 친구들 중에서 귀 뚫은 애들이 많았는데 한번은 지나가던 경찰이 불러 세워 귀걸이를 잡아 뜯더라. 나도 군화로 ‘조인트’를 까였다. 거기서 덤빌 수가 있나. 당시 나도 어쩔 수 없는 방관자였고 돼지였다. 그때 억눌러놓았던 것을 나이 들어 연기하면서 많이 토해내는 것 같다”고 말했다. 오정세 역시 “저도 돼지였기 때문에 경민이 다 이해되고 공감됐다”고 털어놓았다. “아내를 죽여놓고 아무렇지도 않게 통화하는 경민이 이성적으로는 납득하기 어렵지만 자살하기까지의 과정을 보니 이해가 되더라. 그쪽이 감정의 농도도 더 짙을 것 같았다.”

확실히 영화 속 돼지들의 울부짖음은 거세다. 김영진 평론가는 드라마의 완성도가 목소리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에 빚지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연상호 감독은 녹음을 지휘하는 입장에서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고 밝혔다. “배우들이 감정을 쏟아붓고 있을 때 NG를 내기는 특히 더 어려웠다.” 물론 더 힘들었을 사람은 녹음실 안의 배우들이었을 것이다. 양익준 감독도 “탈진할 정도로 너무 힘든 작업이었다. 소리를 많이 지르면 우선 머리가 아프다. 힘도 다 빠지고. 캐릭터에 빠져든 까닭도 있겠지만 육체적 에너지를 소진하는 과정이 제일 어려웠다”고 털어놓았다. 같은 말을 오정세는 애니메이션의 특성을 이해하는 노력이 특히 많이 필요했다고 바꾸어 말했다. “리허설을 하면서 스스로 어느 정도의 높이까지 힘을 쓰고 돌아오겠다는 목표치가 생긴다. 녹음 때 그만큼만 갔다오려고 노력하는 편인데 감독님이 더 가길 원하시면 더 갔다. 개인적으로는 리얼하고 과잉되지 않은 연기를 선호하지만 애니메이션의 그림에 붙이려면 더 많이 표현해야 할 때가 있는 것 같더라.”

김영진 평론가, 연상호 감독, 양익준 감독, 배우 오정세, 강병진 기자(왼쪽부터).

기득권의 다양한 모습

한편 변성기 전의 종석, 경민, 철이를 연기한 여배우들의 목소리는 순진무구하고 깨끗하면서도 기괴하고 불안정하다. 그 점에 주목해 김영진 평론가가 캐스팅 아이디어를 묻자 연상호 감독은 “익준이 형과 정세씨가 어린 시절 연기는 못하겠다고 해서 고민을 많이 했다. 그렇다고 아역을 쓰기엔 어려운 말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여자 목소리였다. 중학교 1학년이면 발육 속도도 차이가 많이 날 때니까 말도 될 것 같아서 경민과 종석은 여성스러운 목소리로, 강민 패거리는 아저씨 같은 목소리로 구분했다”고 설명했다.

<돼지의 왕>에는 강자와 약자, 그 가운데 이상하게 끼어 있는 인물로 찬영이라는 전학생이 등장한다. 권력에 부딪히자 재빨리 태도를 바꾸는 그는 가장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강병진 기자는 “두 세력 사이에서 스스로 무너져버리는 찬영이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나 <말죽거리 잔혹사>와 비교해 <돼지의 왕>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이라고 지적하며 감독에게 굳이 그런 인물을 끼워넣은 의도를 물었다. 연상호 감독은 두 가지 이유를 들었다. 하나는 “철이와는 전혀 다른 대안을 제시하는 찬영이 부서지는 과정을 보여주면 관객이 철이에게 더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고, 다른 하나는 기득권의 양면성을 표현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기득권이 폭력만 행사하는 게 아니라 달콤한 말로 사람을 구슬리기도 하는데 강민이 전자라면 찬영이 후자인 셈이다. 왜, 386세대들이 운동하다 붙잡혔을 때 고문은 잘 버텨놓고 고향 선배라는 사람이 와서 따뜻한 말 던져주면 너무 쉽게 무너졌다고 하지 않나. 그런 캐릭터가 필요했다.”

<돼지의 왕>에서는 구수한 사투리를 구사하는 찬영의 온화함조차 금방 차게 식어버린다. “양지보다 응달이 더 넓은 영화”라고 말하는 김영진 평론가의 마지막 말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이어 그는 “하지만 현실을 사는 우리가 숨쉴 수 있는 부분도 있었으면 좋겠다. 죽은 경민을 끝내 비추지 않고 부감으로 확 바뀌는 엔딩은 너무 가차없어서 안타까웠다”는 바람도 전했다. “<돼지의 왕>처럼 개인과 사회의 치부를 드러내는 애니메이션들이 많이 나와 우리의 삶이 더 건강해졌으면 좋겠다”고 말한 양익준 감독 역시 영화 덕분에 현실정치에도 맑은 혈색이 돌길 소망했다. 과연 연상호의 다음 영화 <사이비>는 <돼지의 왕>보다 밝아질까, 어두워질까. 어느 쪽이든 폭발력 넘치는 차기작이 나오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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