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를 듣다가 울컥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있는데 노래 속의 어떤 단어나 목소리나 멜로디가, 불쑥, 귀로 들어오더니 뒷골을 타고 내려가 심장을 후벼판 다음 재빨리 얼굴로 올라가 눈물샘을 건드린다. 그 시간이 얼마나 짧은지, 내가 어쩌다 눈물을 흘리게 됐는지도 알지 못한다. 눈물은 얼마나 재빠른지 손쓸 틈이 없다. 흐르고 난 뒤에야 닦아낼 수 있다.
누구에게나 그런 노래가 있을 거다. 듣는 순간 무방비 상태가 되는, 갑자기 한숨을 쉬게 되고 어느 순간 가슴이 아릿해지는 노래가 있을 것이다. 한번 눈물을 쏙 빼고 나면 들을 때마다 슬픔은 반복된다. 오랜 시간 동안 노래에 익숙해지면 슬픔은 사라지지만 몇년이 지난 뒤 그 노래를 들으면 슬픔의 감정이 되살아난다.
나에게는 롤러코스터의 노래가 그랬다. 지금도 2002년의 신촌이 또렷하게 기억난다. 롤러코스터의 음악을 좋아해서 첫 번째 앨범부터 얼마나 열심히 들었는지 모른다. 이어폰을 꽂고 계속 들었고, 노래방에 가서도 불렀고(마이크 뺏겼고), 콘서트에도 따라가서 들었고, 거의 매일 들었다. 그들의 명반 ≪일상다반사≫가 조금씩 지겨워질 때쯤 다음 앨범이 나오기를 목 빼고 기다렸는데, 나온다는 말만 많고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10년 전 울컥하게 한 롤러코스터 조원선의 목소리
2002년의 어느 날, 나는 신촌을 걷고 있었다. 생각없이 신촌을 걷던 내 귀에, 너무나 익숙한 조원선의 목소리가 들렸다(요즘은 이런 풍경도 모두 사라졌지만). 레코드 가게의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에 정신을 빼앗긴 채 나는 그 자리에 계속 서 있었다. 비트는 강했지만 노래는 슬펐다. 사람들은 바쁜 걸음으로 곁을 지나갔고, (그때만 해도 뚜렷한 직업이 없었으므로 시간이 많았던) 나는 그 자리에 계속 서 있었다. 뮤직비디오의 한 장면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유령처럼 보였다. 그들의 실루엣은 현실의 장면 같지 않았다. 그 순간, 이상하게 나는 슬펐다. 사람들의 걸음걸음이 모두 슬펐다.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이야기를 안고, 각자의 방향으로 정신없이 사라져가는 게 너무 슬퍼 보였고, 절대 알 수 없을 그들의 삶이 쓸쓸하게 느껴졌다. 그때 들었던 노래가 롤러코스터의 <Last Scene>이었는데, 그 노래를 들을 때마다 신촌의 레코드 가게 앞을 지나가던 사람들의 쓸쓸한 뒷모습이 떠오른다. 돌이켜보면 가사도 어찌나 절묘했던지. ‘나는 아무말도 못했다. 그 자리에 그냥 서 있다. 니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한참 후에서야 알았다.’ 그래, 그자리에 그냥 서 있었다.
그게 그렇게 슬플 일인가, 감수성 과잉이지, 그렇지, 나도 안다, 아는데, 가끔은 모두들 그렇게 슬플 때가 있지 않나. 슬픔을 과학적으로 분석한 존 레이티의 <뇌, 1.4킬로그램의 사용법>이라는 책에는 슬픔을 이렇게 설명한다. “두뇌에서 슬픔은 좌측 편도체와 우측 전두엽의 활동을 증가시키고, 우측 편도체와 좌측 전두엽의 활동을 감소시킨다.” (네? 뭐라고요? 설명을 더…) “슬픔을 통해 우리는 잠시 멈춰서 재편성하고 재평가한다. 우리에게 충분한 고통을 주어 변화할 동기를 유발한다.” (아, 네, 이제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슬픔이란 광범위하다. 불안으로 인한 슬픔은 극단적인 선택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는 슬픔은 오히려 삶의 깊이를 더해주는 자극제인 셈이다.
작아져서 슬픈 나를 위하여, 손성제의 ≪비의 비가≫
두달 전에 다시 한번 그런 일이 있었다. 10년 전과 비슷한 기분이었다. 나는 덜컹거리는 지하철 의자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셔플 기능을 켜둔 채로 음악을 듣고 있었는데, 갑자기 조원선의 목소리가 내 귀를 파고들었다. ‘얼음처럼, 차가워요, 단단하게, 굳어져가요, 그 속에는 들어갈 수가 없어요, 이제는 아무도’라고 노래하는 조원선의 목소리는 시끄러운 지하철 소음 속에서도 또렷하게 내 몸을 떨리게 했다. 10년 전의 목소리와 달라진 게 없었고, 오히려 더 서늘해졌다. 조원선의 앨범에 들어 있는 노래가 아니라 손성제의 ≪비의 비가≫에 들어 있는 <마음, 얼음처럼 단단하게>라는 곡이었다.
그때부터 ≪비의 비가≫ 앨범을 계속 들었다. 이 앨범은 그야말로 슬픔의 파노라마, 슬픔의 버라이어티, 슬픔의 포커스, 슬픔의 집대성이었다. 첫곡부터 끝까지 한번도 웃지 않는다. 웃음기를 보이기는커녕 자꾸만 땅속으로 기어들어간다. 그러나 그 슬픔은 우울로 이어지는 슬픔이 아니고, 자신을 괴롭히게 되는 그런 슬픔이 아니고, 나 말고 다른 사람을 생각하게 되는, 동정 가득한 슬픔이다.
사랑을 한다는 것은 나 말고 다른 사람을 생각하기 시작한다는 뜻이고, 나 말고 다른 사람을 생각한다는 것은 세상에서 나의 크기가 작아진다는 뜻이다. 혼자 차지하던 세계에 타인을 들어오게 하는 것이고, 타인이 잘 살 수 있게 내 영토를 줄이는 것이다. 내가 자꾸만 작아지니까 슬픈 거고, 그래서 자꾸만 물어보고 싶은 것이다. ‘날 사랑하냐고, 날 좋아하냐고’ 묻게 된다. 손성제의 ≪비의 비가≫는 작아지는 내가 슬퍼서 부르는 노래다. (연인이든 세상이든) 누군가와 사랑을 시작한 뒤에 느껴지는 슬픔에 대한 노래다.
‘2011년의 앨범’을 꼽는다면 ≪비의 비가≫를 무조건 포함시켜야 한다. 이렇게 모든 노래가 하나의 방향으로 화살표처럼 움직이는 앨범은 드물다. 모든 노래가 좋지만 ‘앨범’으로서 더욱 훌륭하다. 앨범의 첫곡부터 듣기 시작해 마지막 곡을 다 듣고 나면 어딘가를 관통했다는 기분이 든다. 커다란 감정의 덩어리를 삼켰다가 씹은 다음 뱉어낸 듯한 기분이 든다.
<상상초월 쇼케이스> 공연을 할 때도 슬픔은 여전했다. 손성제는 조용하지만 또박또박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는 사람인데, 노래를 부를 때면 갑자기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한다. 본인은 좋은 보컬리스트가 아니라서 그런 거라고 하지만 내가 보기엔 그의 노래에 그보다 잘 어울리는 목소리는 없다. 바람 같은 목소리, 가지 끝의 나뭇잎이 떨리다가 어디론가 날아가버리는 듯한 목소리다. 손성제는 색소폰을 부는 사람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어찌 보면 그의 색소폰 소리나 그의 노래나 다를 게 없었다. 관악기들이 그렇게 쓸쓸하게 들리는 이유는, 그 속에다 숨소리를 불어넣기 때문이고 손성제는 색소폰에 숨을 불어넣는 것처럼 노래를 부르니 모든 노래가 그렇게 쓸쓸했던 거다.
외로움이라는 것은 아마도 사라지는 것들을 그리워하는 감정일 것이다. 시작부터 끝까지 혼자였다면 절대 알 수 없을 감정,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영토를 줄여본 사람이 아니라면 알 수 없을 감정, 함께하는 순간이 영원하길 바라지만 결코 그게 이루어질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의 감정이 바로 외로움일 것이다. 앨범에서 가장 쓸쓸한 트랙은 <멀리서>라는 곡이다. 조용히 노래를 부르는 객원가수 김지혜의 목소리와 기타 소리 위에 사람들의 소리가 겹친다. 텔레비전 소리 같기도 하고, 공연장에서 들리는 소리 같기도 하다. 사람들은 웃고, 환호하고, 박수치고 있다. 그들이 환호하고 돌아가는 시간의 어두운 골목에서, 웃음과 박수가 모두 끝난 뒤의 적막 속에서, 자려고 누운 침대 위로 보이는 어두운 천장에서, 외로움과 쓸쓸함은 순식간에 그들을 기습 공격할 것이다. 순식간에 심장을 후벼파고 우울을 극대화할 것이다.
외로움이 오기 전에 우리가 먼저 찾아가자. 그게 훨씬 덜 아프다. 외롭지 않다고 자신을 세뇌하다가 어이없는 한방에 무너지지 말고 우리가 먼저 찾아가자. 내가 보장한다. 손성제의 앨범 ≪비의 비가≫를 듣는 순간, 이번 가을과 겨울의 가장 깊고 환한 외로움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슬픔이 오기 전에 만나러 가자. 2011년 가장 슬픈 노래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