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1일 크랭크인한 <스토커>는 최근 촬영을 끝마치고 후반작업에 돌입했다. <스토커>는 지난 10월17일 미국 뉴멕시코에서 크랭크인한 김지운 감독, 아놀드 슈워제네거 주연의 <라스트 스탠드>와 더불어 한국 감독들의 본격적인 할리우드 진출작이라 할 수 있다. 두 영화의 개성은 사뭇 다르다. <라스트 스탠드>가 스피디한 장르적 재미로 충만한 액션 스릴러라면, 현지에서 ‘호러 스릴러’ 혹은 ‘다크 스릴러’로 분류되는 <스토커>는 보다 박찬욱 감독 개인의 취향이 담길 것으로 보인다.

올해 초 서울아트시네마의 ‘아트시네마의 친구들 영화제’에 참석한 김지운 감독은 <라스트 스탠드>에 대한 질문에 답하며 “내 영화가 할리우드에서 직접 제안한 기성품 같은 영화라면 박찬욱 감독님의 <스토커>는 자신의 색깔이 온전하게 담길 매력적인 작품”이라며 “그런데 박 감독님이 시간도 부족하고 제작비가 많지 않다고 투덜댄다”는 농담 섞인 얘기를 건네기도 했다. 역시나 이메일을 통해 인터뷰를 나눈 박찬욱 감독은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고 현장 분위기를 전했다. 스티븐 달드리의 <디 아워스>(2002) O.S.T로도 유명한 미국 현대음악의 거장 필립 글래스가 영화음악으로 참여한다는 이야기도 전했다. 니콜 키드먼은 <디 아워스>와 <스토커> 사이의 교집합이라고도 할 수 있기에 그것은 무척 흥분되는 소식이다.

테네시주 내시빌에서 크랭크인해 어느덧 후반작업에 다다른 <스토커>의 이야기는 이렇다. 인디아 스토커(미아 와시코스카)의 아버지(더모트 멀로니)가 차사고로 숨을 거두고, 장례를 치르고 있는 인디아의 집에 찰리(매튜 굿)라는 삼촌이 찾아온다. 인디아가 어머니 이블린 스토커(니콜 키드먼)와 함께 거의 정서불안으로 살아가고 있던 중 삼촌이 찾아오면서 설명하기 힘든 일들이 일어난다. 그리고 인디아는 삼촌의 존재에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 그렇게 이야기는 불안에 시달리는 틴에이저 인디아를 중심으로 펼쳐지는데,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에서 사이클롭스의 동생 ‘하복’으로 출연한 루카스 틸이 인디아의 학교 친구로 등장한다. 게다가 <애니멀 킹덤>(2009)으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던 재키 위버가 고모 ‘진 스토커’로 출연하고, 스필버그 딸의 친구인 인연으로 스필버그가 발굴한 배우로 알려진 뒤 최근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테트로>(2009)와 <트윅스트>(2011)에 연이어 출연한 엘든 이렌리치까지 가세했다. 대부분의 매체들이 ‘떠오르는 배우들은 물론이며 경험 많고 관록있는 배우들이 어우러진 멋진 캐스팅’이라고 입을 모으는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다.

한편, 찰리 역으로 물망에 오르던 콜린 퍼스는 결국 출연하지 않게 됐다. 하지만 한 인터뷰에서 매튜 굿이 밝힌 내용에 따르면, 스케줄 문제로 찰리 역을 맡지 못한 콜린 퍼스가 무척 안타까워했다고 한다(톰 포드의 <싱글맨>에서 두 사람은 동성 연인 사이로 출연한 바 있다). 아무튼 가족 안에서 형의 자리, 남편의 자리, 아버지의 자리를 꿰차게 된 찰리에 대해 매튜 굿은 인터뷰에서 ‘굉장히 외설적인 남자’라고 힌트를 주기도 했다. 더불어 가장 주인공에 가까워 보이는 미아 와시코스카는 <스토커>를 기대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2010)를 비롯해 최근 <제인 에어>와 <레스트리스>에서 보여준 감각적이고 본능적인 연기를 떠올려본다면 그녀의 필모그래피에서 <스토커>가 어떤 정점에 놓일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촬영 당시 한 인터뷰에서 “박찬욱 감독은 굉장히 쿨하면서도 완벽할 정도로 꼼꼼하며 정말 독창적인 생각들을 갖고 있는 것 같다”며 “촬영현장이 너무 신나고 재밌다”고 흡족함을 표하기도 했다.

촬영 전부터 화제가 된 것은 <스토커>의 시나리오를 쓴 사람이 바로 드라마 <프리즌 브레이크>로 유명한 웬트워스 밀러라는 사실이었다.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하기도 했지만, 매년 할리우드에서 영화화가 안된 아까운 시나리오를 소개하는 ‘블랙리스트’ 사이트에 2010년 리스트로 포함된 작품이었다. 참고로 <소셜 네트워크> 역시 2009년 리스트에 포함된 작품이었으니, 영화화되지만 않았다 뿐이지 상당한 퀄리티의 시나리오들만 모아놓았다고 자부할 수 있을 것이다. 애초에 웬트워스 밀러는 수수께끼의 인물 찰리 삼촌 역을 맡고 싶어 했었다고 한다.

눈여겨볼 것은 <스토커>(Stoker)라는 제목이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작품으로도 유명한 제목 ‘Stalker’가 아니라 브람 스토커의 ‘Stoker’에서 따왔다는 사실이다. 박찬욱 감독이 뱀파이어영화 <박쥐>를 연출했을 정도로 이 장르에 관심이 많다 보니, 제목과 맞물려 <스토커>가 뱀파이어영화가 아닐까 하는 기대를 하는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평소 좋아해온 작가에 대한 오마주의 의미와 고딕 스릴러풍의 무드만 닮았을 뿐’이라는 박찬욱 감독의 말에 비춰보면, 직접적으로 뱀파이어영화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한편, 한창 후반작업 중인 박찬욱 감독은 “식사도 회의하며 먹을 만큼 업무량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라며 “시스템의 차이 속에서도 고유한 취향을 드러내는 방법을 모색 중”이라고 말했다. <스토커>의 제작은 ‘폭스 서치라이트’와 리들리 스콧의 ‘스콧 프리’가 공동으로 맡았으며, 박찬욱과 거의 한몸처럼 움직였던 정정훈 촬영감독이 역시 카메라를 잡았다. <스토커>는 내년 초 개봉예정이다.

영화음악 맡은 필립 글래스

미니멀리즘 음악의 대가

필립 글래스가 영화음악을 맡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스토커>를 기대하게 만드는 요소가 하나 더 늘었다. 1937년 미국 볼티모어에서 태어난 필립 글래스는 미국 현대음악을 대표하는 인물이자 여러 금기를 과감하게 깨버린 미니멀리즘적인 음악을 통해 1960년대 후반부터 뉴욕을 중심으로 조금씩 호응을 얻기 시작했다. 오페라 <해변의 아인슈타인>(1976)과 극음악 <포토그래퍼>(1982) 등이 유명하며 <캔디맨>(1992), <쿤둔>(1997), <디 아워스>(2002), <일루셔니스트>(2006) 등 수많은 영화의 음악 작업을 하기도 했다. <쿤둔>과 <디 아워스>로는 아카데미 작곡상에 노미네이트되기도 했다. 1999년에는 무성영화인 토드 브라우닝의 <드라큘라>(1931)에 그의 영화음악이 입혀진 새로운 버전이 공개됐으며, 2003년에는 내한 공연을 갖기도 했다. 명확한 처음과 끝없이 특유의 중독성으로 다가오는, 어떤 면에서 주술과도 같은 그 반복의 미니멀리즘이 박찬욱 감독의 영화와 제법 어울려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