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의 역습이다. 최근 한국과 마찬가지로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강세를 보이던 미국 TV시장의 흐름이 올가을 드라마로 눈길을 돌렸다. <2 브로크 걸스> <뉴 걸> 등의 시트콤은 방영을 시작하자마자 시청률 안정권에 진입하며 경제 불황에 접어든 미국인들의 즐거운 벗이 되어주고 있다. 스티븐 스필버그라는 ‘빅 네임’이 제작자로 참여한 <테라 노바>는 TV드라마의 퀄리티 혁명을 외치며 <아바타>의 울창한 정글을 브라운관에 이식했다. <팬 앰>은 미국 드라마에서 자주 볼 수 없었던 비행기 승무원들이란 신선한 소재로 시청자를 공략한다. 이처럼 눈여겨볼 작품들이 수두룩한, 2011년 가을 신작 미국 드라마 8편을 소개한다.
파산한 두 언니의 회생 프로젝트: <2 브로크 걸스> 2 Broke Girls
출연 캣 데닝스, 베스 베어스, 가렛 모리스, 조너선 카이트, 매튜 모이 / 채널 <CBS> 웬만해서 당해낼 수 없는 언니들이 왔다. 2011년 가을 시즌 새 시리즈 미드 중에서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인기를 모은 <2 브로크 걸스>의 두 주인공 맥스(캣 데닝스)와 캐롤라인(베스 베어스)을 두고 하는 말이다. 낮에는 맨해튼의 베이비시터로, 밤에는 브루클린의 허름한 식당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하는 씩씩한 맥스와 부유하게 평생을 살았지만 갑부 아버지가 금융사기로 수감되어 하루아침에 빈털터리가 된 캐롤라인, 잃을 것이 없어 무서울 것 없는 두 주인공은 가난 말고는 모두 이겨낼 것 같은 깡다구의 소유자들이다.
<2 브로크 걸스>는 제목이 말해주듯 파산한 두 여자가 주인공인 시트콤이다. 하지만 인간사 전반의 주제를 정해진 설정 안에서 다루는 다른 시트콤들과 <2 브로크 걸스>가 차별화되는 지점 역시 제목이다. 현실은 시궁창이지만 타고난 경제감각, 어깨너머로 배운 경제적 지식들로 무장한 낙천가 캐롤라인은 맥스가 만드는 컵케이크가 맛있다는 사실에서 사업 기회를 포착해 파산 탈출을 계획한다. 매의 눈으로 돈 버는 기회를 찾고, 빚더미에 앉은 맥스를 구출하는 등 <2 브로크 걸스>는 경제극으로서의 면모를 가졌다. 또 한입에 사라질 것 같은 작은 컵케이크를 10달러라고 바가지 씌워도, 주저없이 돈을 내는 젊은이들의 모습은 <2 브로크 걸스>가 단순히 코미디가 아닌 현실풍자극으로서의 영민함도 지녔음을 드러낸다. 특히 노골적인 부분은 파산한 두 여자의 일상이 그려지는 장면들이다. 팁 한두푼에 울고 웃으며, 자선단체가 운영하는 기부물품 매장에서 값을 깎아 쇼핑한다. 너무 궁상맞아 과장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즈음이면, 이제껏 TV가 보여줬던 화려한 의상이며,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서의 식사 등이 허울 좋은 거짓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레 다가온다. 매회 에피소드에서 얼마를 벌고, 얼마를 탕진했는지를 합산해 보여주는 엔딩도 빼놓을 수 없는 재미다. 시작할 때는 50달러였는데 어느덧 500달러를 바라보는 중이다.
<2 브로크 걸스>는 <섹스&시티>를 만든 마이클 패트릭 킹이 만들어 방영 전부터 관심을 모았다. 맨해튼이 한물갔다는 사라 제시카 파커의 조언을 따른 걸까? 킹은 10년을 함께한 맨해튼과 이별하고 브루클린으로 무대를 옮겼다. 하지만 파티하고, 연애하고, 쇼핑하는 젊은 <섹스&시티>를 기대하면 곤란하다. <2 브로크 걸스>는 새벽 2시까지 웨이트리스로 일하는 두 여자가 내일은 조금 더 나아질 거라는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이야기다. 그러니 주머니 얄팍한 두 여자의 연애나 쇼핑은 조금 더 기다려야 할 것 같다. 그 대신 시청자는 다른 재미를 얻게 될 것이다. 톡톡 튀는 두 주인공의 (불협)화음이 그 첫 번째고 인종, 계급, 성별 등 불쾌해지고 불편해지려면 끝도 없는 소재들을 버무려낸 솜씨와 배짱이 두 번째다. 두 가지 모두 대담하고 신선하다.
현대판 캔디와 어리바리 세 친구들: <뉴 걸> New Girl
출연 주이 디샤넬, 제이크 존슨, 맥스 그린필드, 라몬 모리스 / 채널 <FOX>(한국 On Style) 미드 캐릭터 사전에 ‘만화 같은 캐릭터’ 하나가 더 추가됐다. 시트콤 <뉴 걸>의 제스 데이(주이 디샤넬)가 그 주인공이다. 예쁘장한 얼굴, 흰 피부, 붉은 입술, 풍성한 갈색 머리까지, 하지만 이렇게 예쁜 여자의 클리셰로 무장한 제스를 완성시키는 건 어리바리함을 강조하기에 그만인 뿔테 안경이다. 제스는 상냥하면서 엉뚱하고, 순진하면서도 섹시하며, 아름답지만 서툴고, 성미 급하지만 사랑스럽다. 딱 순정만화에 나올 법한 캐릭터다. <500일의 썸머>에서 주이 디샤넬에게 “썸머, 이 못된 계집애”를 외쳤던 남자들은 이제 그만 잊을 것. <뉴 걸>의 제스는 얄미운 구석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캐릭터다.
<뉴 걸>은 오랜 남자친구로부터 배신당한 제스가 세 남자와 한집에 살게 되면서 시작된다. 제스의 친구들이 대부분 ‘모델’이라는 사실에 깊게 감명받아서 제스를 룸메이트로 받아들인 세 남자 닉(제이크 존슨), 슈미트(맥스 그린필드), 윈스턴(라몬 모리스)은, 외로워도 울고 슬퍼도 우는 ‘현대의 캔디’ 제스를 스테어, 아치, 안소니처럼 보살펴줄 정도로 자상하며, 테리우스처럼 러브라인을 기대할 만큼의 귀여움도 지녔다. 언뜻 보기에 <뉴 걸>은 예쁜 여학생에게 안경을 씌워놓고 안 예쁘다고 주장하는,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는 반드시 예쁘게 변신하고야 마는, 그래서 남자들이 간이고 쓸개고 다 빼주고야 마는 순정만화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제스만큼이나 순진하고 어리바리한 세 룸메이트가 실연 뒤 첫 데이트에서 바람맞은 제스를 위해 레스토랑에서 <더티 댄싱>의 <Time of My Life>를 열창할 때, 제스가 전 남자친구의 유치한 억지에 한마디 대꾸도 못할 때 더 유치하게 맞서 싸워줄 때, 남자이지만 실연에 아파하고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줄 때, 시청자에게 <뉴 걸>은 ‘세 남자의 공주 만들기’에서 그치지 않는, ‘네 친구’의 이야기로 반갑게 다가올 것이다.
<뉴 걸>은 최근 10년간 <FOX>에서 방영된 코미디 중에서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당연한 결과겠지만, 제작자로도 참여한 주이 디샤넬의 흔적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제스의 성격, 제스의 스타일, 심심하면 대화를 노래로 만들어서 부르는 괴상함까지, 제스는 주이 디샤넬이라는 사람의 일부를 과장해서 만들어진 캐릭터 같다. 주이 디샤넬이 활동하는 인디 팝 듀오 ‘She & Him’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놀랍지 않겠지만, 이 재주 많은 여배우는 <뉴 걸>의 오프닝 테마곡까지 작곡했다. “TV시리즈 <웰컴 백 카터>(Welcome Back, Kotter)의 테마곡을 좋아해서, 비슷한 느낌으로 만들고 싶었다”고 말하는 <할리우드 리포터>와의 인터뷰 비디오를 보고 있으니, 이런 생각이 든다. “주이 디샤넬, 이 복 받은 계집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