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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겁한 나’를 만나다
2011-11-08

만화 <이끼> 윤태호 작가가 본<돼지의 왕>

웹툰 <이끼>의 윤태호 작가에게 <돼지의 왕>을 보여주고 감상을 들어봤다. 연상호 감독의 <돼지의 왕>을 만화가인 윤태호의 시선에서 보고자 했던 이유는 <이끼>와 <돼지의 왕>이 닮은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두 작품 모두 한정된 공간에서 권력을 가진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대립 구도를 다룬다. 윤태호는 <돼지의 왕>을 보고 그 안에 자신의 모습이 있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연상호와 자신이 닮았다고 했다.

나에겐 몇 가지 밀리지 않는 ‘말발’의 소재가 있다. 하나는 가난이다.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면 스스로 가난하다는 자각을 한 시기가 고등학생 때였다. 그전엔 다들 이 정도 사는 거 아닌가 생각했다. 그러던 것이 만화가로 생활하며 뻥이 꽤 세지고 풍부해진 표현력을 바탕으로 술자리에서의 장악력을 놓지 않으려는 승부욕에 비극적 감수성이 더해져 내 어린 시절은 더욱더 가난해졌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굴욕, 복종, 소박한 저항, 막대한 패배에 관한 부분이다. 수없이 이사를 다니고 학교를 옮기면서 자연스레 형성된 자세가 있다. 먼저 다가서야 하는 사람으로서 혹시 모를(하지만 너무도 당연히 따라올) 상처에 대한 관리가 그것이다. 상황에 대한 판단보다 빠르게 나오는 어색한 웃음이 그것인데 마치 ‘난 아무렇지 않아’라고 남들에게 보여주는 태도였다. 이 웃음은 <돼지의 왕>에서 강민이란 학교 내 학급의 권력자가 경민의 고추를 조몰락거릴 때(난 고추를 내준 적 없었지만!) 경민이 보여주는 어색한 웃음 같은 거다. 그 웃음을 만회하려 웃음이 일상인 사람이 되어야 했고 대단히 관용적인 사람이어야 했다. 정 못 참을 땐 들릴 듯 말 듯한 소박한 목소리로 불만을 토해내고 그 덕분에 6학년 여반장에게 따귀까지 맞아야 했다(잘 생각해보면 그때도 웃었던 것 같다. 아놔). 이랬던 나에게 쾌감을 주는 것들이 있었는데 노력과 상관없이 주어지는 권위가 그것이다. 미술부 생활을 하며 선배라는 이유만으로 권력을 얻게 되었는데 그것조차 학교 1학년 ‘짱’이 미술부에 후배로 들어오며(어째서 ‘짱’씩이나 되는 놈이 미술부에…) 3개월 만에 막을 내리게 됐다. 본격적인 권력의 맛은 만화 화실 문하생을 하면서다. 비교적 이른 나이에 몇 단계를 올라서면서 두세살 어린 후배들에게 수시로 담배 심부름, 술 심부름을 시키기 시작했다. 후배들 사이에 사소한 말다툼만 있어도 모두 소집했다. 그러나 그 쾌감은 내적으로 불안정하고 위험한 정신 상태를 만들었다. 언젠가는 오후 4시에 출근하다 선배와 술집으로 향해 다음날 오전 중국집 여는 시간에 술국으로 해장할 정도로 내일이 없는 생활을 했다. 한 선배가 진지하게 나에 대한 걱정을 이야기해주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과 많이 다른 모습이었을 거다.

연상호 감독과는 페이스북으로 이름만 아는 친구가 되고 나서 한참 뒤에 만날 수 있었다. 나와 생김새가 닮았다. 연상호 감독도 그런 이야기 많이 듣는다고 한다. 낮술을 함께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으나 내가 아직 <돼지의 왕>을 못 봐 작품 이야기를 많이 못해 아쉬웠다. 그리고 이 원고를 쓰면서 보게 된 <돼지의 왕>. 굴욕과 복종, 소박한 저항과 막대한 패배가 담겨 있고 괴물이 있었으며 피해자, 가해자, 방관자, 배후자, 권력에 기생하는 조력자를 넘나들었던 내가 이 애니메이션에 고스란히 다 담겨 있었다. 도무지 떨쳐버릴 수 없었던 이미지는 철이의 등을 떠미는 나다. 자신의 바람을 다른 이에게 투사하고 마는 비겁한 나. 꼭 가까운 시일 내에 연상호 감독을 다시 만나 모닝 술국을 함께 먹을 때까지 술을 마시고 이야기하고 나누고 싶다. 그날은 내 ‘말발’이 좀 죽어도 괜찮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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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윤태호 만화가 <이끼> <야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