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안현진의 미드 크리에이터 열전
[안현진의 미드 앤 더 피플] 악마와 거래한 평범남
안현진(LA 통신원) 2011-11-11

<브레이킹 배드>의 브라이언 크랜스턴

<브레이킹 배드>

<X파일>의 작가이자 프로듀서, 연출자 빈스 길리건이 만든 <브레이킹 배드>(Breaking Bad)는 대중성과 작품성을 공히 인정받고 있는 드라마다. 평생 담배라고는 피워본 적 없는 고등학교 화학교사 월터 화이트(브라이언 크랜스턴)가 어느 날 폐암 말기 진단을 받는다. 장애가 있는 10대 아들과 임신한 아내와 함께 사는 화이트는 자신이 죽은 뒤 가족이 살아갈 방도를 마련하기 위해 묘책을 생각해낸다. 화학과목 F를 받았지만 마약제조자로 경찰의 주목을 받고 있는 졸업한 제자 제시 핑크먼(아론 폴)과 손잡고 메탐페타민 제조와 판매를 시작하는 것이 그 묘책인데, 이야기는 이 기발한 설정에 기폭장치라도 단 듯 상상 가능한 모든 방향으로 뻗어나간다. 무대가 되는 지역은 뉴멕시코주의 앨버커키. 마약 제조에서 출발해 판매까지 가담하게 된 화이트와 핑크먼은 곧 지역 조직폭력배들과 얽히게 되고 앨버커키 경찰 마약전담반의 추격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지루하고 볼품없던 평범한 중년 남자의 삶은 아드레날린을 치솟게 하는 폭력의 가운데 놓이게 된다.

케이블 채널 AMC에서 방영되는 <브레이킹 배드>는 2008년 작가조합파업이라는 역경의 시대에 시즌1을 시작해 2011년 8월 시즌4를 마무리하고, 마지막 시즌을 남겨둔 상황이다. “화학과 학생들은 보드카도 만들어 먹는다더라”류의 도시괴담과 같은 설정에서 출발한 이야기는 마약조직과의 연결, 조직간 세력다툼, 둘 중 하나만 살아남는 시장경제(혹은 조직경제)의 법칙 등 소재 자체에서 줄줄이 딸려오는 굵직한 잔가지들을 살려내 풍부한 이야기를 담은 TV시리즈로 자라났다. 무차별적이고 불필요한 폭력이 아닌 필연적인 폭력의 공포, 인간은 어디까지 잔혹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설계된 에피소드의 구성, 수직으로 내려다보거나 올려다보는 극단적인 시점숏, 35mm로 촬영한 색감 풍부한 화면 등 <브레이킹 배드>의 빼어난 점을 꼽자면 끝이 없다. 하지만 <브레이킹 배드>는 주인공 월터 화이트를 연기하는 브라이언 크랜스턴 없이는 이야기할 수 없다.

브라이언 크랜스턴은 <브레이킹 배드> 이전에는 그야말로 ‘평범함’을 연기하는 배우였다. 국내에 그의 얼굴을 알린 작품은 2000년대 초반 방영된 시트콤 <말콤네 좀 말려줘>(Malcolm in the Middle)로, 당시 사진과 <브레이킹 배드> 속 크랜스턴을 비교하면 두 사람이 같은 사람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5년 전의 그가 젊기도 하지만 인생의 희로애락 중에서 오직 기쁨과 웃음만을 아는 얼굴처럼 보여서 더욱 그렇다. 하지만 <브레이킹 배드> 시즌1부터 시즌4에 이르기까지 문자 그대로 ‘변화하는’ 그의 얼굴을 보고 있자면 TV시리즈를 보는 즐거움은 이런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비루한 중년의 남자가, 이제껏 몰랐던 세상의 어두움, 그리고 그보다 더 어두운 자신의 내면을 마주하면서 일어나는 인생의 변화가, 고작 두 손바닥이면 가려질 그의 얼굴 위에 펼쳐지기 때문이다. 궁지에 몰릴 때마다 보이는 불타는 그의 두 눈동자는, TV 화면을 뚫고 나올 것 같다.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악마와 거래한 남자가 죽기도 전에 지옥에서 사는 모습이 있다면 바로 이 모습일 것이다.

너무 진지하니까 재미없지 않냐고? 수작이라고 꼽히는 TV시리즈들이 시즌이 더할수록 시청률이 줄어드는 것과 다르게 <브레이킹 배드>는 시즌이 더할수록 점점 더 많은 시청자를 사로잡고 있다. 2008년부터 2010년까지 에미상 시상식 TV시리즈 드라마부문 남우주연상을 3연패했다는 것도 드라마와 캐릭터의 인기를 방증하는 터. 솔직히, 아직 <브레이킹 배드>를 못 본 사람들이 부럽다.

관련영화

관련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