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정세가 또 한번 큰 웃음을 안겨준다. <커플즈>의 흥신소 직원 ‘복남’은 ‘친구의 친구를 사랑한’ 운명의 장난에 빠진 남자다. 흥신소 직원의 역할에 충실하면 할수록 그 여자의 비밀을 더 많이 알게 되니 그 또한 괴로운 노릇. 어쨌건 그는 <부당거래>에서 주양 변호사(류승범)를 ‘쌍스러운’ 사람으로 만든 기자, <쩨쩨한 로맨스>에서 친구의 창작의 비밀을 캐내려는 안 풀리는 만화가, 그리고 <퀵>의 퀵서비스 메신저 등으로 출연하며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시작했다. 물론 이미 양익준과 함께 독립영화계의 오랜 스타배우 중 하나다. 그런 존재감은 장편애니메이션 <돼지의 왕>에 목소리 연기로 참여한 것으로 이어진다. <돼지의 왕>에서 한참 세월이 흘러 오랜 비밀을 터트리고야 마는 남자 ‘경민’도 매력적인 캐릭터다. 공교롭게도 두 영화는 같은 날 개봉이다. 살다보니 이런 날도 생겼다. 그렇게 오정세는 우리에게 한발 더 가까이 다가왔다.
-<커플즈>의 ‘복남’에게 어떻게 접근했나. =친구의 친구를 좋아하는 소심한 남자다. 아닌 척하면서 은근히 바랄 건 바라는 남자다. 친구 유석(김주혁)의 여자친구인 나리(이시영)가 끈적하게 다가와 마치 키스할 것 같은 상황이 벌어지면 그럴 마음이 없는 척하는데도 이미 입은 벌어져 있고 손은 안경을 벗고 있는 그런. (웃음) 나리와 단둘이 만날 때는 2 : 8 가르마에 양복으로 멋도 부린다. 자기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모른다.
-영화를 위해 특별히 준비한 설정이 있다면. =옷 벗겨지는 장면을 위해서 두달 전부터 배를 만들었다. 식스팩과 정반대다. (웃음) 그냥 보기엔 나름 스타일리시하고 ‘가오’도 있는 남자인데 포박당해서 옷이 벗겨질 때 ET처럼 배가 볼록하면 노출의 재미가 있지 않겠나 싶어서. 그래서 두달 전부터 몸을 망가뜨렸다. 영화보다 더 비쩍 마르고 배만 볼록한 걸 원했는데 좀 애매하게 나온 거 같아 아쉽긴 하다. 게으른 배우라고 생각하면 안되는데. (웃음)
-김주혁, 이시영, 이윤지, 공형진 등에 비하면 인지도 면에서 덜 알려진 게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커플즈>는 인물마다 각자의 확실한 에피소드를 가지고 끌고 나가는 구조다. 어찌 보면 그런 점도 영화를 선택한 기준이 된 건가. =그런 효과가 있다면 다행인데(웃음), 그래서 영화를 택했다기보다 각자의 에피소드들이 실타래처럼 엮인 채 이어지는 구조 자체가 마음에 들었다. 한 공간에서 두 사람의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알고 보니 그 공간에서 또 다른 두 사람의 이야기가 엮여 있는 그런 구성이 재밌었다. 그러다보니 나는 거의 김주혁, 이시영씨하고만 엮여서 다른 두 배우와는 만날 일이 없었다. 물론 흥신소 직원이자 친구의 친구를 사랑해서 고민에 빠지는 역할 자체도 좋았다.
-공교롭게도 주연으로 목소리 연기를 맡은 <돼지의 왕>도 <커플즈>와 같은 날 개봉한다. =남들은 좋겠다고 얘기하는데 나는 ‘아 또 한동안 일거리 없겠네’ 하고 생각한다. (웃음) <커플즈>나 <돼지의 왕>은 조금 포지션이 다른 영화이기도 한데다 워낙 결과물이 좋아서 둘 다 잘될 것 같다. 나로서는 두 작품에서 ‘오정세’라는 사람이 중첩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최근 내 모습들을 보고 <쩨쩨한 로맨스>에서 이선균씨의 친구 만화가 역할이었던 ‘해룡’ 비슷하게 보시는 분들이 많은데 나로서는 해룡은 물론이고 <커플즈>의 복남이나 <돼지의 왕>의 경민, 다 다르다.
-<돼지의 왕>에서 함께 목소리 주연을 맡은 양익준과는 오랜 절친이다. 오래전 양익준 감독의 <바라만 본다>에서 투톱 연기를 한 것처럼 이번에도 그렇게 목소리 연기를 했다. =예정에도 없이 <똥파리>에도 출연하고, 하여간 워낙 오래된 친구다. 2000년 배우 명계남씨가 신인배우 양성 목적으로 만들었던 일종의 연기아카데미인 ‘액터스21’에서 처음 만났는데, <부당거래>에 봉고차 운전기사이자 범인으로 나온 우돈기랑 함께 오디션 엄청나게 보러다니는 절친이었다. 마침 <품행제로>(2002) 때 ‘세셈트리오’라는 3인방이 있었는데 거의 기적처럼 우리 3명이 거기 딱 합격했다. 꽤 비중있는 역할이었는데 나는 다른 연극과 겹쳤고, 우돈기도 다른 일로 빠져서 익준이만 출연하게 됐다. 그러면서 세셈트리오의 비중이 줄어들어서 많이 아쉬웠다.
-목소리 연기를 해보니 어땠나. =그런 새로운 일과 캐릭터들을 다 도전이라고 생각한다. <커플즈>의 복남이나 <돼지의 왕>의 경민도 마찬가지다. 하기 힘들어 보이면 피해가고 그랬던 적도 있는데 이제는 그냥 다 한다. ‘하다보면 늘겠지’ 하는 생각이랄까. 원래 좀 숫기가 없어서 전에 결혼식 사회를 보다가 망친 적도 있다. 마이크를 잡고 “오… 늘… 이 자리에… 오신… 신사… 숙… 녀… 여러…분…” 그렇게 거의 울먹이면서 얼마나 떨며 진행을 했던지, 내가 사회를 본 룸이 가령 백합홀이라면 다른 홀 사람들이 전부 백합홀로 구경올 정도였다. 근데 이제는 부탁하면 다 한다. “나 결혼식 사회 잘 못 보는데 괜찮겠어? 나야 상관없지만 네가 괜찮겠어?” 그런 식이다. 노래도 못 부르지만 노래방에서 누가 노래시키면 “나야 상관없지만 내가 노래부르면 다들 힘들 텐데 괜찮겠어? 그럼 나 한다, 뭐라고 그러지마” 그런 식이다. (웃음)
-예능프로그램 출연이나 라디오 일일 DJ도 그런 일종의 ‘무데뽀’ 도전정신의 연장인가. =하하,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다보니 자신감이 생기고 편안해진다. 돌이켜보면 심하다 싶을 정도로 수없이 오디션을 보러 다닌 것도 꼭 발탁되기 위해서라기보다 그런 자신감을 키우는 과정이었던 것 같다. 말주변이 없는데도 TV 예능프로그램 <유재석 김원희의 놀러와>에 출연하고 라디오 <최강희의 볼륨을 높여요>에 DJ도 했다. 예전에는 민폐라고 생각해서 다 거절하고 그랬는데 이것저것 해보는 게 좋은 것 같다. 아무도 부탁하지 않는 것보단 나은 거 아닌가. (웃음)
-<부당거래>나 <쩨쩨한 로맨스> <퀵>을 비롯해 최근 몇몇 예능프로그램을 통해 초등학교 여자친구와 결혼한 순정남으로 소개되면서 이제 좀 본격적으로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 같다. =<커플즈> 모니터 시사를 해봐도 관객 중 서너명은 알아보는 수준이었다. 사실 그렇게 알려지지 않은 걸 배우로서 즐기는 측면도 있었다. 그러면서 이제 ‘배우 오정세’에 대해 알리고 싶다. 예전에 인터뷰를 하면 기자님과 1시간 동안 ‘배우 오정세’에 대한 얘기를 나눴는데 기사 제목은 ‘오복슈퍼 아들의 배우 도전기’ 그런 식으로 제목이 나가고 기사가 나갔다. 인터뷰 내내 잠깐 쉬어가면서 우리 집이 슈퍼를 했고 어쨌고 잠깐 했던 얘기가 더 크게 나가는 거다.
-무엇보다 그 ‘배우 오정세’는 상대배우와의 호흡이 절묘한 것 같다. 다른 조연배우들이 혼자 ‘신 스틸러’처럼 드러나는 걸 즐긴다면 <부당거래>의 기자나 <쩨쩨한 로맨스>의 해룡, 그리고 <커플즈>의 경민까지 늘 그 호흡을 중요시하는 것 같다. =그렇게 봐주신다면 너무 고맙다. 독백이 아니라면 배우로서 가장 중요한 건 결국 그런 호흡이 아닐까 싶다. <부당거래>는 전에 <라듸오 데이즈>를 함께했던 류승범의 도움이 컸다. 여전히 나에게는 상업영화 현장이 불편한 느낌이 들 때가 종종 있는데 ‘편하게 놀자’는 느낌으로 잘 적응하게 해줬다. 얼마 전에 촬영한 <시체가 돌아왔다>에서도 친구로 나오는데 느낌이 좋다. <부당거래>에서는 서로 경쟁하는 직업 관계였다면 이번에는 정반대 성격의 친구로 나온다. <커플즈>의 다섯 배우는 하나같이 조화를 잘 이루는 배우들이라 큰 걱정이 없었고 시나리오보다 더 풍성해진 것 같다. 김주혁씨가 물 맞으며 살짝 다리 떠는 거, 이윤지씨 앞에 놓인 막걸리 잔에 손가락 얹으며 ‘띵~’ 하는 거 살짝 애드리브를 한 건데 절묘했다. 이윤지씨도 실연당한 역할로 카페에 앉아 있는 느낌이 좋았다. 영화 전체의 정서와는 다르게 가면서도 묘하게 슬픈 분위기가 생겨났다.
-당신의 오랜 팬들은 여전히 <8월의 일요일들>(2005)의 헌책방 주인 ‘소국’ 이미지를 기억하고 좋아한다. =액터스21을 수료하고 난 다음 첫 작품이 <수취인불명>(2001)이었고, 배우가 되기 위해 수많은 오디션을 보러 다녔다. 그사이 연극도 꾸준히 했고. 독립영화나 단편영화 혹은 상업영화에 출연하는 오정세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8월의 일요일들>은 슬퍼 보이는 것처럼 연기하지 말자는 생각으로 작품에 임했다. 내가 진짜로 슬프면 남들도 나를 슬프게 볼 것이라는 생각이 중요했다. 그 영화를 하면서 너무 좋았고 모두 배우 오정세를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다. 오히려 내가 걱정하는 건 내 이미지가 너무 희극적으로만 굳어지는 건 아닌가 하는 거다. 앞서 <시크릿>이나 <베스트셀러>를 할 때는 오히려 어두웠는데 비슷한 작품들이 이어지면 그렇게 보는 측면이 있다. 배우로서 하나의 색깔로만 규정되는 거, 그게 가장 무섭다.
-결혼식 사회를 보면서 느꼈던 ‘떨림’은 여전히 유효한가. =물론이다. 배우로서의 떨림도 아직 있고 내가 무엇을 하건 영원히 함께 가야 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한번쯤은 그런 떨림이나 긴장없이 막 자유롭게 놀아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보지만 기본적으로 나는 그 떨림을 안고 살고 싶다.
-좋아하는 연기자가 있다면. =특정한 누군가보다는 구체적인 캐릭터로 기억한다. <넘버.3>의 송강호, <파이란>의 최민식, <프라이멀 피어>의 에드워드 노튼, 늘 생각나는 영화들이다.
-2012년도 역시 엄청 바쁜 해가 될 것 같다. 어떤 작품들이 기다리고 있나. =아까 얘기한 <시체가 돌아왔다>가 있고 <퍼펙트 게임>에는 야구해설가로 우정출연했다. 원래는 그물에 매달리는 광팬을 할 뻔했다가 그렇게 됐다. (웃음) 그리고 하지원씨와 함께한 <코리아>에는 탁구선수 유남규로 나온다. 당시 유남규씨가 23살이어서 지금의 내가 연기하기엔 좀 벅차긴 한데 잘 봐줬으면 좋겠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