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의 왕>은 성인용 애니메이션이다. 지금까지 제작된 국내 장편애니메이션 가운데 성인만을 위한 애니메이션은 흔치 않다. 2006년에 개봉한 <아치와 씨팍> 정도가 떠오른다. 그 이름도 거론하기 민망한 <블루시걸>(1994)은 또 다른 의미의 성인용 애니메이션이었다. <돼지의 왕>이 19금 딱지를 받게 된 이유는 ‘잔혹스릴러’라는 홍보 문구처럼 수위 높은 폭력을 담았기 때문이지만 진짜 이유는 어른들만이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다.
사업에 실패하고 아내를 살해한 경민(오정세)은 참혹한 상황에서 대필작가로 살아가는 중학교 동창 종석(양익준)을 만난다. 둘은 철이(김혜나)라는 친구를 회상한다. 종석의 내레이션으로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기억해낸 그들의 학창 시절은 지옥과 다름없다. 빈부격차에서 오는 학내 계급의 맨 아래에 있었던 어린 종석(김꽃비)과 경민(박희본)은 온갖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었고 살아남기 위해 비굴한 웃음을 지어야 했다. 그런 자신들을 종석은 ‘돼지’라 불렀다. 철이는 이 돼지들 사이에 나타난 괴물이다. 경민과 종석은 철이를 ‘왕’처럼 따랐다. <돼지의 왕>의 줄거리에서 언뜻 <말죽거리 잔혹사>가 떠오르기도 하지만 <돼지의 왕>은 더 극단적인 방식으로 폭력을 묘사한다. 희망이라는 단어를 거론하기 힘든 파국으로 치닫는 <돼지의 왕>은 죽음을 앞둔 사람의 공포와 욕망을 세밀히 담은 연상호 감독의 전작 <지옥: 두개의 삶>에서 보여준 것처럼 명확하게 하나의 지점으로 나아가는 힘이 있는 애니메이션이다. 그 끝에는 소름끼치는 절망이 도사리고 있다. 특히 엔딩에 다다르면서 긴장감은 절정에 이른다. 이때 이를 배가시키는 장치는 오정세, 양익준의 목소리 연기다. 탄탄한 스토리에 기반한 <돼지의 왕>은 1억5천만원이라는 저예산과 1년이라는 짧은 제작기간으로도 훌륭한 애니메이션을 만들 수 있다는 새로운 기준을 보여준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