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가 의미있는 것은 쌓아온 시간과 기억들이 그만큼의 신뢰를 더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명실상부 본격 국제단편영화제로 자리매김한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가 아홉 번째 비행을 시작한다. 세계 최초의 기내영화제에서 출발하여 모든 장르와 소재를 아우르는 본격 국제영화제로 거듭난 이번 영화제는 단편영화의 대중화와 대안적 배급에 기여한 그동안의 내실을 바탕으로 더욱 다양한 프로그램을 선보인다. 국내 최초, 최대 규모라는 명성에 걸맞게 총 90개국에서 역대 최다인 2137편이 출품되었으며 그중 엄선된 35개국 54편의 작품을 본선 경쟁에서 만날 수 있다. 그 밖에도 단편영화를 통해 한국과 일본의 숨겨진 모습을 만날 수 있는 ‘트래블링 쇼츠 인 코리아’와 ‘트래블링 쇼츠 인 재팬’, 전세계 유명 감독들의 초기 단편과 최신작을 함께 만날 수 있는 ‘감독 열전: 올드 앤 뉴’는 물론, 3·11 일본 지진참사를 기리는 옴니버스영화까지 다양한 프로그램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지면관계상 미처 싣지 못한 나머지 단편영화들의 무한한 상상력과 역동적인 힘은 11월2일부터 7일까지 씨네큐브 광화문에서 열리는 영화제 현장에서 직접 느껴보시라.
<3·11 센스 오브 홈 필름즈> 3·11 Sense of Home Films 2011년 | 67분 | 봉준호, 김수영, 가와세 나오미,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외 18명
때로 상처는 우리를 아름답게 한다. 천재지변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상처가 지울 수 없는 흉터가 될지 새살이 힘차게 돋아날지는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렸다. <3·11 센스 오브 홈 필름즈>는 전세계 유명 영화감독들과 예술가들이 영화로 치유하기를 실천한 희망어린 성과물이다. 3월11일 일본 대지진참사를 기리기 위해 예술가 21명이 각각 3분11초가량의 영상을 선물한 이번 옴니버스 작품은 황폐해진 마음속 폐허에서 희망을 길어올린다. 한국의 봉준호, 김수영 감독을 비롯하여 중국의 지아장커, 일본의 가와세 나오미, 타이의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처럼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유명 감독뿐만 아니라 가수, 배우, 포토그래퍼, 만화가 등 다양한 예술가들의 참여가 이채롭다. 특히 3분11초라는 짧은 영상이 주는 여운은 이 영화가 건네는 위로의 울림을 더욱 강력하게 만든다. 연출 스타일, 주제, 이미지 등은 전혀 상이하지만 신비하게도 모든 작품을 관통하고 있는 어떤 위안을 발견할 수 있다. 각 작품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마다 당신도 공감이라는 이름의 아름다움을 선물받을 것이다.
감독열전: <당신 곁에 잠들고 싶어요> To Die by Your Side 2010년 | 6분 | HD | 컬러 | 애니메이션 | 스파이크 존즈, 시몬 칸
시몬 칸, 스파이크 존즈 감독이 2011년에 만든 최신 단편애니메이션. 파리의 한 고서점, 해가 지고 가게의 불이 꺼지면 책장에 진열되어 있던 책 속 주인공들이 살아 움직인다. 맥베스에 등장하는 해골은 드라큘라의 여자친구 미나와 사랑에 빠지지만 두 사람의 만남에는 수많은 위험과 역경이 기다리고 있다. 기발한 상상력과 소재만큼 펠트를 이용한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기법의 흥미로운 표현력이 눈에 띈다. 영화의 내용도 물론 재밌지만 엔딩 음악과 함께 흘러나오는 에필로그가 더욱 매력적인 작품이다.
감독열전: <승강기> The Lift 1972년 | 7분 | 디지베타 | 흑백 | 픽션 | 로버트 저메키스
기계는 과연 사람을 편리하게 하는가. 깔끔한 정장을 입은 신사는 오래된 엘리베이터가 마음대로 작동되지 않자 당황한다. 몇번의 승강이 끝에 기다리고 있는 결말은 남자의 죽음이다. 남자와 기계의 대립을 통해 기계화된 세상의 실상을 우화적으로 드러내는 작품이다. 흑백으로 촬영된 영화는 50∼60년대의 낡고 간단한 기계장치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디지털 치매’가 유행하는 지금 시점에서 보면 감독의 섬뜩한 통찰은 훨씬 통렬하게 다가온다. 디지털 이미지의 선봉장인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의 작품이란 점에서 더욱 흥미로운 영화다.
국제경쟁: <아마디> Amadi 2010년 | 15분 | 35mm | 컬러 | 픽션 | 지아 만드비왈라
모든 인간에게 타인은 외계인이다. 하지만 마음의 벽을 조금만 허물고 보면 그같은 구분과 배척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깨닫게 된다. 르완다 난민 아마디에게 뉴질랜드는 섬이나 다름없다. 그는 철저히 차별받으며 아무와도 교류할 수 없고 아무도 그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다. 어느 날 앞집에 사는 정서불안의 괴팍한 아주머니가 그에게 배달된 한통의 편지를 읽어주며 두 사람은 서로가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된다. 결국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아버지이자 어머니, 아들이자 딸이다. 짧은 상영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짜임새있는 전개와 설득력이 인상적인 작품.
국제경쟁: <균형잡기왕 선발대회> Yureni Yurarete Yurarete Yurari 2011년 | 20분 | HD | 컬러 | 픽션 | 마카베 유키노리
열차가 출발하고 사람들은 긴장한다. ‘메이조 선 균형잡기왕 선발대회’의 규칙은 간단하다. 격렬하게 흔들리는 전철 안에서 헬멧 위에 올려놓은 구슬들을 모두 떨어뜨리지 않고 버티는 마지막 한 사람이 우승한다. 이 어이없는 설정의 영화는 참으로 진지하고 그래서 매력적이다. 허를 찌르는 전개로 실소를 자아내는 가운데 참가자들의 사연을 하나씩 교차시키며 삶의 다양한 모습들을 보여준다. 덕분에 기발한 소재로 포장되었음에도 영화가 전하는 진정성은 결코 가볍지 않다. 어떤 의미에서는 뻔하고 진부하지만 그것 또한 우리의 인생과 닮았다.
국제경쟁: <빨리빨리> Get a Move On! 2011년 | 21분 | 디지베타 | 컬러 | 픽션 | 페타르 오레스코비치
매일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기계부품처럼 움직이는 사람들. 주인공 미로 역시 반복된 일상에 아무 불만없이 공허한 삶을 지속해 나간다. 하지만 균열은 의외로 쉽게 일어난다. 매일 아침 출근길 신호등에서 마주치는 여인의 싱그러운 미소만으로도 삶은 달라질 수 있다. 크로아티아에서 날아온 이 색다른 이미지의 영화는 동화 같은 화사한 색감과 군더더기 없는 연출로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인간성을 말살하며 규칙과 효율만을 강요하는 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도 엿보인다. 영화를 보고 나면 분명 오렌지주스 한잔이 마시고 싶어질 것이다.
트래블링 쇼츠 인 재팬: <슈퍼스타> Super Star 2011년 | 18분50초 | HD | 컬러 | 픽션 | 하기와라 겐타로
한류가 대세는 대세인가 보다. <슈퍼스타>는 한류스타를 만나러 온 일본 여성팬의 이야기를 담았다. 도시코는 한류스타를 직접 만날 꿈에 부풀어 그만 늦잠을 잔다. 팬미팅 장소에 늦지 않기 위해 운전연습차량을 택시로 착각하고 억지로 잡아타보지만 이미 끝나버린 뒤다. 그때부터 운전사 박씨와 함께 한류스타의 하루를 뒤쫓는 여행이 시작된다. 이제는 우리에게 익숙한 풍경이 된 한류스타와 일본 팬의 관계를 경쾌한 드라마로 풀어내는 한편 사람 사이에 흐르는 따스한 정이 흠뻑 묻어나는 작품이다. 웃음을 자아내는 디테일한 설정이 돋보이는 가운데 마지막 장면을 보노라면 가슴 한쪽이 따뜻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