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 어머니 그리고 아내와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산악인 허영호 그리고 그의 아들 허재석이 에베레스트 등정 길에 올랐다. 전세계적으로 험악하기로 소문난 산을 오르고 탐험하느라 집을 비운 아버지 대신 가정을 지켰던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부자는 “온 가족이 다 같이 손을 잡고 에베레스트에 오르자”는 오래된 약속을 지키기로 한 것이다. 목숨을 담보로 하는 위험한 등정. 그러나 정상을 향해 힘차게 내딛는 발자국마다 삶에 대한 본능 그리고 뜨거운 가족애가 오롯이 떠오른다. 7대륙 최고봉과 3대륙 극점의 고지에 깃발을 꽂은 허영호 대장과 아들 허재석의 에베레스트 등정 다큐멘터리 <20년 전의 약속>이 극장판으로 재편집해 10월26일 개봉했다. 부자의 모험이자 가족애를 재확인하는 산행을 끝낸 지금, 그들은 새로운 모험을 꿈꾸며 삶의 목표를 다시금 정하고 있었다.
-어떻게 이 다큐멘터리를 찍게 되었나. 허재석_원래는 아버지 혼자 떠날 계획이었다. 지난해 1월 어머니가 돌아가신 직후였다. 아버지 혼자 보내는 것이 불안해서 나도 따라간다 했다.
-TV에서 방송될 때와 극장 개봉은 기분이 어떻게 다른가. 허영호_삽입된 음악도 전부 달라지고 분량도 20분가량 늘어났다. 감회가 새롭다.
-아들과의 에베레스트 등반은 대원들과 갔을 때와 느낌이 사뭇 달랐겠다. 허영호_대원들끼리 갔을 때하고 느낌이 많이 다르다. 다 큰 아들과 함께한다는 데 의의가 컸다. 처음엔 걱정을 많이 했다. 그래서 주의해야 할 사항들을 반복적으로 얘기했던 것 같다. 반면에 즐겁고 재밌는 시간들이 많았다. 외국 등반가들이 부자가 함께 등정하는 것을 부러워했다. 가족끼리 함께 등정하는 것이 흔치 않다. 자료가 있긴 할 텐데 부자가 에베레스트에 등반한 건 최초이거나 두 번째일 거다.
-전문 산악인이 아니다보니 다큐멘터리 찍는 내내 허재석씨는 많이 힘들어하더라. 아버지로서 또 산악인으로서 어떤 도움을 주었나. 허재석_같이 등반을 한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유럽 최고봉인 엘부르즈에 같이 갔었는데 그때만 해도 고산 등반에 대한 개념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산악인인 아버지가 챙겨주는 것을 그대로 따랐다. 그때나 지금이나 아버지의 도움이 컸다.
-다큐멘터리 내내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래서 이번 등반은 그동안 한 어떤 모험보다 부자의 감회가 남달랐겠다. 허재석_등반한 기간이 50일 정도 된다. 정점에 오르니 성취감이 있더라. 그런데 황홀한 기분은 안 들더라. 오히려 살아서 내려가고 싶은 생존욕구가 강하게 들었다. 소중한 가족앨범이 생긴 기분이다. 허영호_난 그냥 기분이 좋았다. 영원히 남는 기록이니까. (웃음)
-3극지점 그리고 7대륙 최고봉을 등정한 산악인이자 모험가지만 매번 이렇게 모험을 하는 것도 만만치 않겠다. 준비과정은 어떤가. 허영호_다른 준비보다 3억원 정도의 경비를 마련하는 일이 제일 힘들다. 허재석_체력적인 부분에 신경을 썼다. 달리기를 많이 했고 떠나기 전 4개월 동안은 설악산에 가서 설벽, 빙벽타기 훈련을 했다.
-아들과 함께 에베레스트를 등정하는 여정은 어땠나. 허영호_다 큰 아들에게 사소한 것까지 이것저것 가르쳐주는 것이 재밌더라. 허재석_같이 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아버지와 더 친해지더라. 전에 몰랐던 아버지의 모습도 보게 되고.
-허영호 대장은 왜 산을 타게 된 건가. 허영호_중학생 때부터 산을 좋아했다. 욕심이 생겨서 산을 타다가 세계 3대 극지점까지 모험하게 됐고 지금은 경비행기를 타고 하는 세계일주를 준비한다. 얼마 전에 경비행기로 전국일주를 했다. 10시간 걸리더라. (웃음)
-아버지의 직업이 산악가이자 모험가이긴 하지만 매일 집을 비우고 위험한 모험을 하는 터라 걱정도 원망도 많이 하지 않았나. 허재석_어렸을 때는 같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적어서 아버지가 야속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내가 그 누구보다 독특한 경험을 많이 한 사람으로 클 수 있었던 거 같아서 아버지께 감사하다. 남들보다 시야가 넓어진 것 같다.
-부자가 같이 산을 타고 모험을 하면서 배운 지혜나 깨달음이 있나. 허영호_열심히 하면 무엇이든 자기 것이 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정상에서 또 다른 정상이 보인다는 것. 사람이 변화하는 삶을 살기가 힘들다. 나는 80년대는 히말라야를, 90년대는 북극과 남극을, 2000년대는 경비행기를 타고 있다. 변화가 있는, 목표가 있는 삶을 살고 싶다.
-허재석씨는 이번 등정으로 무엇을 느꼈나. 허재석_인내심이나 도전심이 많이 생겼다. 그리고 아버지를 좀더 이해하는 계기가 됐다. 아무리 산이 좋아서 간다지만 정말 힘들구나 하는 걸 이번에 많이 느꼈다. 그리고 왜 하는지도 이제야 알게 됐다. 산에 다녀오면 향수가 생기더라. 그리고 큰 자극이 되더라. 마치 작가들이 다음 작품 쓰고 그 다음 작품을 쓰는 것처럼 하나 이루고 나면 그 다음 것이 생각난다. 특히 목표를 이루고 나서 성과가 크더라. 이번 등정은 그런 걸 느낀 것 같다. 무엇보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약간이나마 해소할 수 있었다.
-안타까운 소식이지만 박영석 대장 소식을 안 물어볼 수 없다. 허영호 대장이 “박영석은 꼭 돌아올 것이다”라며 타 매체에서 말하기도 했지만 아직 이렇다 할 소식이 없다. 누구보다 속상하고 많이 걱정되겠다. 허영호_일주일이 흘렀다. 보통은 2~3일 내에 소식이 있어야 산다고 본다. 이제 희망이 없지만 그래도 살아 돌아왔으면 좋겠다.
-앞으로 두분이 같이 또 등정할 계획은 없나. 허재석_회사에 취직해서 앞으로는 힘들 것 같다. (웃음) 허영호_무슨 소리, 시간나면 그때도 같이 가는 거다.
-은근히 허재석씨는 다음 모험을 피하는 것 같은데. (웃음) 허재석_아니다. 회사일 때문에 힘들긴 하겠지만 시간되면 가겠다. 허영호_휴가 내. 한달 정도.
-허영호 대장은 타고난 모험가니 또 다른 고지를 정해놓았을 것 같다. 다음 목적지는 어디인가. 허영호_경비행기로 하는 세계일주다. 허재석_어렸을 때부터 아버지 꿈이 파일럿이었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