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밤의 승부는 짜릿했다. 서울시장 보궐선거 말이다. 예상보다 저조한 투표율 때문에 마음 졸이고 있었는데 출구조사 결과가 나오는 순간 탄성이 절로 튀어나왔다. 마감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도 자리를 이리저리 옮겨가며 축하주를 주고받았던 것도 그 흥분을 붙잡아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이번만큼 투표결과를 놓고 긴장한 적도 없는 것 같다. 그건 절박했다는 얘기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처한 상황이 절박했고 우리의 삶이 절박했으며, 그래서 변화에 대한 욕구가 절박했다는. 물론 지난 몇년 동안 극도로 악화된 정치, 경제, 사회 등을 생각해보면 우린 여전히 절박한 상황이다.
부산영화제에서 <돼지의 왕>을 보면서도 그 절박함을 느꼈다. 중학생 시절 경민과 종석, 그리고 철이는 모두 돼지였다. 그 돼지들은 좋은 집안 출신에 힘깨나 쓰는 강민이나 송석응 같은 개들의 먹잇감 노릇을 한다. 그 어린 개들 위에는 상급생들과 학생회라는 큰 개들이 있다. 시스템을 장악한 개들은 폭력을 매개로 돼지들을 꼼짝 못하게 만든다. 돼지들은 그들의 폭력에 저항하기보다는 비굴한 웃음을 흘리며 목숨을 부지한다. 이 현실을 바꾸기 위해선 악마가, 괴물이 돼야 한다고 생각하는 철이가 등장해 파란을 일으키긴 하지만 결국 시스템의 위력에 무릎 꿇고 만다. 경민과 종석, 철이가 돼지인 이유는 그들의 부모가 돼지이기 때문이다. 개가 개인 이유도 아마 그들의 부모가 개이기 때문일 것이다. 돼지들이 우리를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은 보이지 않는다. 굴종하거나 악마가 되기, 양 갈래의 선택밖에 존재하지 않는 <돼지의 왕>의 세계는 가슴을 갑갑하게 했다. 갈수록 심화되는 양극화로 개와 돼지의 세상이 점점 더 뚜렷하게 구분되고 개들만을 위한 온갖 조치가 횡행하는 이 세상과 너무도 비슷했기 때문이다.
부산영화제에서 <돼지의 왕>을 본 많은 외국 영화인들도 좋은 평가를 내렸다. 영화제 기간 동안 나는 아시아영화진흥기구(NETPAC)가 수여하는 상의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는데 함께했던 두명의 외국 영화인은 이 영화의 극적 구성과 애니메이션으로서의 완성도를 인정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이 영화의 사회적 함의 또한 알아챘다. 그건 한국뿐 아니라 세계 다른 곳의 삶도 점점 나빠지고 있다는 얘기일지도 모른다. 극소수 금융자본이 세계의 부를 좌지우지하고 분쟁은 끊이지 않으며 사회가 보수화되고 있는 탓에 그들 또한 비슷한 절박함을 느끼는 것이었으리라.
<돼지의 왕>은 그 절박함에 단비를 뿌려주진 않는다. 오히려 그 절박함을 더욱더 절박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건 절망이나 좌절과는 다르다. 파워풀한 드라마 안에 담겨 있는 이 충격적인 비극은 마음을 무너뜨리는 동시에 눈을 부릅뜨게 한다. 중요한 정치적 선택을 얼마 앞두고 있는 이 시점에 여러분께 <돼지의 왕>을 강추하는 것도 절박함을 공유하고 싶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