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시오패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어떤 짓을 저질러도 죄책감이 없다는 점에서 사이코패스와 닮았으나, 충동적이고 감정조절을 못하는 사이코패스와 달리 감정통제에 대단히 유능하다. 그런 까닭에 뻔히 알고서 주도면밀하게 사고를 친다. 사람들을 이용하고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한다. 이들에게 타인과 공동체는 자기 이득과 지배력 증명을 위해 존재할 뿐이다. 소시오패스에 대한 대처법으로 첫손에 꼽히는 것은 ‘그들이 내 옆에 있다는 사실을 잘 알기’이다. 양심지수 0의 소시오패스들, 유사 소시오패스들이 어떤 짓을 하는지 우리는 지난 서울시장 선거 과정에서 일정 정도 확인했다.
연회비 1억원의 피부클리닉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충격이었지만 건물 하나 사고팔면 6년 남짓 시세차익과 임대료로 20억원을 가뿐히 버는 삶을 살면서 안 그래도 만신창이가 된 서울시 행정까지 지배하려 했다는 점에서, 대체 그 탐욕의 끝은 어디일지 궁금증이 일었다. 단지 특정 후보의 문제가 아니다. 그들은 왜 모든 것을 다 가지려고 들까.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밀어올린 ‘성공’과 ‘집값’에 대한 꿈은 깨진 지 오래다. 유례없는 검은 그림자가 먹고사는 문제를 덮치는 가운데, 공포와 분노, 배신감과 피로 등등이 보통 사람들의 일상을 짓누른다. 정권과 자본에 결탁된 미디어의 공백을 개인들의 네트워크가 대체하고 있지만, 힘에 겹다. 풍자와 고발은 인내와 위로의 다른 얼굴일지 모른다. 모두들 가까스로 버티고 있는 형국이다. 서로 격려하고 고무하면서도…, 불안하다. 어쩌면 보통 사람들에게 최선의 연대는 그저 서로를 불쌍히 여기는 게 아닐까.
<겁쟁이가 세상을 지배한다>를 쓴 오스트리아의 생명과학자 프란츠 엠 부케티츠에 따르면 다윈의 적자생존이 말하는 ‘적자’는 용기가 아니라 적합함을 기준으로 한다. 최전방에서 용감히 싸우다 장렬히 전사하는 병사가 아니라 명령을 거부하고 도망친 탈영병이 주인공이다. 죽는 것보다 조롱받는 것이 나으며, 피하고 도망치고 숨는 것도 중요한 전략일 수 있다. 세상은 용기있는 자의 것이 아니며 죽은 영웅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결국 자연은 삶과 생존을 위한 전략을 갖춘 개체를 선택하니까. 공룡처럼 화석만 남기고 사라지느냐, 자연의 적자로 살아남느냐. 개인들의 생존 의지가 탐욕을 이제 겨우 한번 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