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 반 산트의 젊음이 ‘사랑’에 쏟는 시간을 굳이 계량한다면 한줌이나 될까. 사랑은 당연히 논외여야 했다. 그들 앞엔 항상 감당하기 버거울 정도의 젊음의 고뇌가, 등에 찰싹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도록 고안된 죽음이 짓누르고 있었으니까. <레스트리스>라고 그 젊음이 쉽게 변할 리 없다. 여전히 탈 많고 불안하기 짝이 없는 구스 반 산트식의 두 젊은이가, 그리고 그들 앞에 놓인 죽음이라는 문제가 당당하게 한 자리를 차지하고 나선다. 그런데 이 불안의 순간들, 구스 반 산트는 전에 없이 새로운 장치를 더한다. 바로 새싹처럼 비집고 나오는 풋풋한 청춘의 사랑.
에녹(헨리 호퍼)과 애너벨(미아 와시코스카)이 처음 만난 곳은 장례식장이다. 역시나, 소년과 소녀의 사랑담을 펼쳐놓기에 썩 좋은 장소는 아니다. 에녹은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고 임사상태에 빠진 경험을 가진 소년으로, 그 트라우마를 남의 장례식에 몰래 참석해 풀며 지낸다. 스케이트보드를 타거나 총기를 난사하는 일 따위 없이 그저 장례식장에서 남의 추도사를 경청하고 고인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정도의 범죄! 마침 그날 간 곳이 말기암 환자인 애너벨의 친척 장례식이었다. 신기하지만 애너벨은 바로 에녹을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생의 영역으로 적극 끌어들인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찬란해야 할 첫사랑의 순간. 에녹과 애너벨을 단단하게 묶어주는 키워드는 ‘죽음’이다. 시한부 애너벨에게 죽음은 실질적인 문제이고, 가족의 죽음을 경험한 에녹에게 죽음은 이상이다. 에녹에겐 심지어 그의 환상에만 존재하는 가미카제 친구 히로시(가세 료)가 있을 정도다. 둘의 애정행각 역시 죽음을 떼놓고 볼 수는 없다. 예를 들면 영안실 방문, 할로윈데이 가장행렬 쫓아가기, 시체놀이(이 장면의 감각적인 표현은 경이로울 지경이다. 십대들이 흔히 하는 우스꽝스러운 시체놀이조차 구스 반 산트는 이토록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는 감독이다), 죽음과 가장 인접해 있는 불안의 나날, 그들은 오히려 눈에 띌 정도로 많이 웃고 많이 행동하고 많이 뛰어다니며 젊음을 소비한다. 어른을 흉내내려는 아이처럼 에녹과 애너벨은 생의 에너지로 충만해 있는 이들만이 내지를 법한 액션과 탄성을 고스란히 모방하고 재연한다. 즉각적이고 동물적이며 생생하다.
<레스트리스>에서 깨달음의 순간은, 아마 관객에겐 애너벨이 에녹에게 연극을 제안하는 장면에서일 것이다. 자신이 떠나고 남겨진 에녹을 위한 상황을 가정하는 내용의 상황극에서 발랄했던 둘의 연애담은 곧바로 아픈 현실이 된다. 구스 반 산트의 의도대로, 아이들은 자신들만의 가혹한 환경에서 성장했겠지만 정신없이 그들의 연애담에 이끌려왔던 관객에게 감정의 파고를 수습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재빨리 극장문을 나서본들 비틀스와 핑크 마티니, 수프얀 스티븐스의 음악과 한데 어우러진 미아 와시코스카의 보이시한 단발머리, 헨리 호퍼의 사슴 같은 눈망울은 한동안 잊기 어려울 거다. 구스 반 산트의 필모그래피에서 차지하는 의미를 떠나, 감정적 동화로 따져볼 때 <레스트리스>는 분명 우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