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진흥위원회가 영화진흥사업 중장기 계획을 발표했다. MB 정권 들어온 이래 몇 차례 비슷한 발표가 있었지만 이번이 특별해 보였던 건 영화인들의 목소리를 어느 정도 반영했기 때문이다. 이 발표에 앞서 여러 영화인들을 모셔놓고 좌담회를 가진 것만 봐도 김의석 위원장 체제의 영진위가 영화인들의 의견에 귀기울이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해준다. 위원장 스스로 영화인 출신인데다 전임 위원장 두명이 현장의 아우성을 듣지 않아 비판받았으니 당연한 행보인지도 모른다.
영진위는 이름에서 드러나듯 한국영화를 진흥하는 기관이다. ‘국내의 영화 환경을 최적의 상태로 만들고 한국영화의 해외 진출에 도움을 준다’고 영진위의 업무를 간략하게 정리할 수 있겠지만 사실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1999년부터 2002년까지의 1기 영진위가 한국영화를 만들 수 있는 자본 확충에 힘을 기울였고, 2기가 시스템 정비에, 3기가 다양성영화의 생존에 역점을 두고 사업을 펼쳤지만 2008년 이후 영진위는 초점을 잃은 듯 보였다. ‘한국영화 재발명’ 같은 거창한 구호가 나붙었지만 영진위는 현장과 분리돼왔다. 특히 다양성영화에 대한 지원을 철회하고 민간 위탁 시스템을 도입하면서 영진위의 존재 의의조차 희미해졌다.
이번 중장기 계획에서 영진위는 ‘해외 진출 및 부가시장 신르네상스 구현’, ‘영화산업 생태계 혁신’, ‘미래 인프라 구축’, ‘책임경영 기반구축’ 등 4대 과제를 내세웠다. 아무래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영화산업의 생태계를 바꾸겠다는 계획일 것이다. 소수 대기업 중심으로 꾸려지고 있는 한국영화산업 시스템을 손봐 다양한 중소 자본과 제작사가 공존하는 산업환경을 만들겠다는 이야기다. 한국영화동반성장협의회라는 기구까지 만든다고 하니 현 영진위의 역점사업은 아무래도 영화계에서 ‘공정사회’를 구현하는 일인 듯 보인다. 영진위는 이를 위해 표준계약서를 제도화하고 대기업의 불공정행위 모니터링을 강화한다는 등의 대책을 세워놓았다.
이영진 기자가 정리한 영화인 좌담회 기사를 보면 아시겠지만, 많은 영화인들은 대기업의 전횡적 시장 지배가 현재 한국영화산업의 가장 큰 문제점이라고 지적한다. 일부 이견이 있긴 하지만 한국영화산업뿐 아니라 미학적 발전 또한 정체국면에 이른 듯한 인상을 주는 데는 대기업의 영향이 크다. 현재 대기업들은 블록버스터급 영화부터 독립영화까지, 투자와 배급에서 제작과 후반작업까지, 극장에서 방송까지 아우르려는 욕망을 과시하고 있다. 또 갖가지 모니터링 시스템을 도입해 대다수 영화를 평준화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작은 규모의 제작사와 중소 자본이 이들의 질주를 막을 길은 없다. 브레이크를 걸 수 있는 건 현재로선 영진위밖에 없어 보인다. 문제는 제도가 아니라 의지다. 중장기 계획에 적혀 있는 여러 제도도 중요하지만 영화생태계를 복원하겠다는 확고한 의지야말로 현 영진위가 견지해야 할 가장 중요한 노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