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듣는 것은 아는 것에 우선한다
유현목 감독의 <문>에 대한 나의 기억은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텔레비전에서 길쭉하게 위아래로 늘린 흑백화면으로 보았던 영상의 조각들이다. 다른 하나는 고 하길종 감독의 에세이집에서 김기영 감독의 <이어도>와 더불어 “한국영화의 장래에 밝은 빛을 비추어주는”(정확한 표현인지 자신은 없지만) 훌륭한 영화라고 극찬했던 글을 읽었던 기억이다. 이 두 가지 기억의 편린들은 나의 두뇌가 수집한 고전 한국영화에 대한 담론과 지식의 조각들에 고고학자가 파편화된 토기를 복원하듯이 접합되어, “내가 아마도 이런 영화를 본 것이겠지?”라는 추정을 가능케 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추정을 하나의 판단으로 굳어지게끔 하였다.
올해 들어 완벽과는 한참 거리가 있지만 최소한 영화의 화면비, 색깔과 음영을 심각하게 훼손하지 않는 프린트로 <문>을 관람할 기회가 주어졌다. 순간 나는 충격에 휩싸였다. 나의 머릿속에 하나의 그럴듯한 전체상으로 굳어져 있던 <문>이라는 ‘복원된 토기’는 실제 모습과 마주치자마자 누가 수류탄이라도 던져넣어서 폭파한 것처럼 슬로 모션으로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나는 ‘아마도 이런 영화를 본’ 것이 전혀 아니었던 것이다.
<문>이라는 1977년작의 이른바 ‘재발견’의 가치를 증명하는 요소들을 열거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정일성 촬영감독과 그의 협력자들이 펼쳐놓는 숨이 콱 막힐 듯이 아름다운 영상, 최창권 작곡가의 드라마틱하게 ‘영화적’인 음악과 어우러지는 황병기, 황병주, 설금옥 연주자들의 가야금 선율의 유려함, ‘TV 탤런트’라는 고정관념에서 비롯된 이미지들을 완전히 와해시키고도 남음이 있는 최불암과 박근형의 경이로운 연기 등. 이러한 놀라운 미적 성취 및 서사와 연기의 힘 이외에도 <문>에는 ‘작가주의’니 ‘리얼리즘’이니 하는 개념들로 단순화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지만 그것이 정확하게 무엇인지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이 나에겐 없다. 단지 유현목 감독이 <수학여행> <불꽃> 심지어 <엄마와 별과 말미잘>에 이르기까지 내가 본 그의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보여주었다고 여겨지는 것은, 카메라의 렌즈를 통해 삼라만상을 맑게 바라보는 자세가 아닐까 추측할 뿐이다.
일본사 전공으로 공부를 시작한 나로서는 <문>이 일본인 캐릭터들을 다루는 방식에 대해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야쓰하시 부자(父子)는 고토(琴)의 현대화 및 대중화라는 현실적인 목표와 자신들의 음악의 원천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다시 한번 그것을 쇄신하고 싶다는 욕망 사이에서 고뇌한다. 이들은 물론 한국인 연기자들이 한국어로 연기하는 캐릭터들의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지만 그들의 욕망이 ‘가야금 민족주의’에 종속되거나 ‘국민문화’ 간의 콩쿠르로 치환되는 일이 없이 영화 안에서 완수된다는 점에서 그 어떤 한국영화의 일본인 캐릭터들과도 차별된다. 그들은 (실제 역사상의 식민주의자들과 달리) 우담선생과 그의 딸의 주체성을 인식하며 또한 한국인 가야금 연주자들도 그들의 욕망을 승인한다. “우리가 너희보다 잘났다는 객관적인 사실을 왜 모르느냐?” 또는 “너희는 우리와 달리 객관적으로 나쁜 놈들이라는 사실을 왜 모르느냐?”라는 투의 제국주의(그리고 그 제국주의를 쏙 빼닮은 ‘반제국주의’)를 표상하는 어리석은 질문들은 <문>에서는 아예 그 자취가 없다. 이러한 <문>의 시각은 유현목 감독이 에티오피아에서 이스라엘로 베게나(열개의 현이 달린 하프와 비슷한 악기)의 원류를 찾아서 떠나는 모슬렘 아프리카인 작곡가의 이야기를 영화화했다 할지라도 전혀 흔들림이 없었을 것이다.
“보는 것이 아는 것에 우선한다”라고 장 뤽 고다르가 어딘가에 썼다고 한다. 아마도 고다르가 이 말을 한 맥락은 다르겠지만 <문>을 다시 보는 것은 ‘보는 것(과 듣는 것)’이 ‘아는 것’보다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새삼스럽게 깨닫게 해주었다. 부디 이러한 ‘한국영화’에 대한 무지몽매함을 깨칠 수 있는 행복한 경험을 더 많이 하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물음표
나는 임권택의 68번째 영화 <가깝고도 먼 길>을 처음 보았을 때 어리둥절했다. 이야기는 단순하(지만 기괴하)다. 낙도 어린이들과 자매결연을 맺고 돌아오던 초등학생 인철이 배가 난파되는 바람에 북한에 상륙한다(이게 말이 되나?). 거기서 또래의 북한 어린이 동만을 만난다(반공영화로군, 난 이미 어떻게 끝날지 잘 알고 있어!). 둘은 우여곡절 끝에 친구가 되어(그럴 줄 알았어) 함께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한으로 가려고 한다(자, 그 다음은 어떻게 될 것 같은가?). 그리고 휴전선을 넘다가 둘 다 총에 맞아 사살당한다. 도대체 어쩌자고 이런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었을까. 이 몸서리쳐질 정도의 냉소적 아이러니의 세계. 동화에 가까운 가정에서 시작한 이 영화는 거의 성공할 것만 같은 자리까지 우리를 데려가서 스스로에 대한 비웃음을 끌어내다가 갑자기 방향을 선회해 모든 노력을 제로로 만든 다음 이게 우리의 현실이에요, 그러니 제발 나에게 불가능을 요구하지 마세요, 라고 능동적으로 영화가 자기 자신을 맞받아쳐서 부숴버린다. <가깝고도 먼 길>은 반공영화가 스스로 자신의 낭만적 망상에서 시작해서 반공 이데올로기의 욕망이 성립되지 않는 현실과 대면하도록 이끌고 간 다음 문득 통일에 대한 ‘어린아이 같은’ 상상을 상징화할 수 없는 곤궁 안으로 밀어넣는다. 이때 당신은 이 영화의 시대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아직 박정희가 살아 있을 때 만들어진 거의 마지막 반공영화.
이미 임권택은 1976년 <왕십리>를 찍은 ‘다음’부터 걸작들의 행진을 준비하고 있었다. 적어도 이 영화는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영상시대 동인들의 도시 저변의 하층계급에 관한 ‘팝콘’ 비애극(pop corn-Trauerspiel)들보다는 훨씬 훌륭하다. 1978년에 심훈의 원작 소설을 각색한 <상록수>는 문예영화의 걸작이며, 거의 같은 시기에 만든 같은 원작의 영화화인 김기영의 <흙>과 비교하면 두 대가가 어디서 서로 풍경과 미학적으로 헤어지고 한편으로 어떻게 박정희 시대의 마지막 피비린내 나는 부패의 공기를 공유하고 있는지를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해 아마도 임권택의 모든 영화 중에서 ‘가장 비통하리만큼 아름다운’ <족보>를 만들었다. 이듬해 79년 <신궁>과 <깃발 없는 기수>를 만들었고, 마침내 80년 <짝코>, 그리고 81년 <만다라>를 완성했다. 말하자면 이 시기는 임권택의 창조의 곡선이 완전히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서던 중이었다.
<가깝고도 먼 길>이 숨은 걸작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이 영화는 너무 괴상해서 어쩌면 1978년, 그 순간 임권택이 가지 않은 또 다른 영화의 가능성을 생각해보게 만든다. 그러나 임권택은 자기 영화에서 ‘그 이후’ 던져진 세상에 대한 냉소의 태도를 일체 버리고 성찰이라는 방법을 택했다. 그것이 <깃발 없는 기수>와 <짝코>, 그리고 <만다라>로 이어지는 새로운 ‘지향’의 목표를 선택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어쩌면) 그가 가지 않은 선택은 ‘지양’을 통해서 환상을 쳐부수는 쪽으로 나아갔을지도 모른다. 물론 나도 알고 있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가정이다. 다만 나는 임권택에 관한 생각을 할 때마다 1978년에 하여튼 잠시 멈춰 선다. 그저 그 생각을 잠시 고백하고 싶었을 따름이다. 내 가정은 정확하게 딱 여기까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