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다보면 샘이 날 때가 많다. 소설이 너무 재미나면 부러워서 샘이 나고(이런 소설을 써야 하는데 말이지!), 너무 재미없는 소설을 보면 이렇게 재미없는 소설을 끝까지 써낸 끈기와 용기에 샘이 나고(이건 아닌가) 이래저래 샘이 많다. 그중에서도 참을 수 없는 샘이 솟구쳐 오르는 순간은 내가 쓰고 싶었던 책을 누군가가 이미 썼다는 걸 알았을 때다. 게다가 너무 잘 쓴 책이라서 내가 다시 태어나도 그보다 잘 쓸 수 없다는 걸 깨닫고 나면 절망은 배가 된다. 얼마 전 소설가 닉 혼비가 쓴 <노래들>을 읽을 때 그랬다(내가 다시 태어난 곳이 1960년대의 영국이라면 또 모를까, 이런 책은 정말 쓸 수 없다).
닉 혼비의 글을 읽을 때마다 깜짝깜짝 놀란다. 너무 잘 써서 놀라는 것도 있지만 내가 쓴 글 같아서 놀랄 때도 많다. 쓰는 언어도 다르고, 태어난 시기도 다르지만 비슷한 생각을 할 때가 많다. 이런 문장 다음에 저런 문장이 오면 좋을 것같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문장이 실제로 종이에 펼쳐져 있고, 이런 음악 이야기가 나와서 ‘아, 이것 말고 그 음악도 좋은데’ 생각하면 바로 그 음악이 등장한다. 뭐야, 내가 쓴 건가? 표지를 들춰보면 당연히 닉 혼비의 책이다.
<노래들>은 내가 쓰고 싶었던 스타일의 책이다. 이 책의 원제는 <31songs>, 말 그대로 31곡의 노래에 관한 글인데, 이런저런 쓸데없는 에피소드들을 엮어서 어찌나 구수하게 얘기를 잘 풀어내는지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게 된다. 닉 혼비는 취향도 나와 참 비슷하(다기보다 내가 영국사람 취향인 건지도 모르겠)다. 리플레이스먼트와 폴 웨스트버그를 좋아하고, 에이미 만이 최고의 여성 싱어송라이터라 생각하지만 솔왁스처럼 새로운 음악을 하는 팀도 인정해준다. 나 역시 이런 ‘내 인생의 노래들’에 대한 글을 묶어 책을 내고 싶었다(최신 가요 한곡을 요모조모 분석하는 칼럼 ‘최신 가요인가요’를 기획했다가 아무도 흥미를 느끼지 않는 바람에 좌절한 적도 있지만) 한국 음악으로 이런 책을 쓰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음악에 대한 이야기가 좀더 쌓이면 언젠가는 책을 낼 수도 있겠지. (닉 혼비와 마찬가지로) 나 역시 앨범 단위로 음악을 듣기보다는 노래에 더욱 흥분했기 때문에 책을 읽으면서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다.
그 노래를 ‘풀기’ 위해 듣고 또 듣고
책에서 (미국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인) 데이브 에거스의 흥미로운 생각을 읽었는데, 그 사람 말로는 “사람이 노래를 반복해서 재생하는 것은 그노래를 ‘풀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럴듯한 이야기다. 음악도, 사람도, 물건도 마찬가지 아닐까.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기 시작하는 것은, 그 사람의 인격이나 정체성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도대체 그걸 어떻게 알고 사랑해) 그 사람에게서 알 수 없는 묘한 흥미를 느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알 수 없는 그 무엇을 풀기위해 (흠, 푼다니까 좀 야릇한 어감이 되어버렸지만) 반복해서 만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대학 시절, 그리고 20대 후반에 음악을 가장 열심히 들었는데, 그때는 정말 싸우는 심정으로 음악을 들었던 것 같다. 새로운 음악을 만나면 그걸 풀어내기 위해 밤새 음악을 들었고, 닥치는 대로 음악을 들었다. 시험문제 풀 듯 한곡 한곡을 열심히 들었고, 좋아하는 노래를 만나면 음반에다 작은 표시를 해두었다.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내가 가진 CD 케이스 뒤에는 작은 점들이 찍혀 있는데, 그건 좋아하는 노래를 표시해둔 거였다. 음반을 한장 사게 되면 우선 좋아하는 노래를 가려낸 다음 그 노래 중심으로 음반을 들었는데, 이 무슨 근거없고 허무맹랑한 자신감이었는지 모르겠다. 어떻게 음반을 한번만 듣고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알아낸다는 거지? 그때 들었던 음악들, 그때 찍었던 점들, 다 취소! 해야하는 건가.
취향은 바뀌고, 입맛도 달라진다. 요즘 그때 들었던 음반을 다시 들어보곤 하는데, 당연히 점을 찍는 지점이 다르다. 오래 전 책에 그었던 밑줄을 이해하기 힘들 듯 오래전 점을 찍었던 곡에서 흥미를 찾기 힘들다. 그건 이미 풀어버렸으니까, 이미 다 알게 됐으니까. 대신 전에는 지루하게 느꼈던 곡이 새롭게 들린다. 닐 영을 듣다가 뜻밖의 순간에 멈칫하게 되고, 한번 듣고는 내팽개쳐두었던 로빈 히치콕을 다시 듣고 있다.
‘하와이’의 쇼케이스 준비를 위해 이아립의 음반을 다시 들었는데, 예전과는 좋아하는 곡이 완전히 달라졌더라. 스웨터 앨범 중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곡은 (한 천번쯤 들었을까) <분실을 위한 향연>이었는데, 다시 들어보니 <아비>라는 곡을 풀고 싶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일까. 처음 들었을 때는 뭔가 어색한 곡이라고 생각했는데, 점점 그 노래가 좋아진다(가을에 어울리는 노래라 그럴지도 모르겠다).
무한 낙천주의 <C’est La Vie>
요즘 내가 풀고 있는 노래는 이아립과 이호석의 밴드 ‘하와이’의 <C’est La Vie>라는 곡이다. 이 곡 참 기묘하다. 들을 때마다 조금씩 다른 곳을 건드린다. 희한한 것은 이 노래를 듣고 있으면 이아립의 얼굴이 허공에 보인다는 거다. 목소리가 어찌나 시각적인지, 조금은 시니컬한 표정으로 씨익 웃으면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이아립의 얼굴이 어른거린다. 이건 무슨 신기술이지? 홀로그램 목소리 기법 같은 것인가?
또 하나 기묘한 순간은 가사를 들을 때다. 원래 가사는 이렇다. “C’est La Vie, C`est La Vie, 인생은 짧고 이 순간은 길다. C’est La Vie, C’est La Vie, 내일은 내일의 태양에게 맡기자.” 그런데 이 가사를 들을 때마다 ‘내일은 내일의’를 자꾸만 “내 일은 내일 해”로 듣고 만다.
그래, 내 일은 내일 하자. 암, 내일도 또 해가 뜰 거고, 인생은 짧고 이 순간은 길고 기니까 지금을 즐겨야지, 암, 그렇고 말고, 이렇게 마음대로 생각해버리는 거다(나만 그런가. 다른 분들도 그렇게 듣고 있지 않을까). 그렇게 듣게 된 것은 아마도 이 음반의 낙천 때문일 것이다. 제목부터 ‘하와이’인데다 ‘C’est La Vie’나 ‘놀자병’이라는 노래 제목만 봐도 낙천이 듬뿍 느껴진다.
쇼케이스 공연 때도 그랬다. 두 사람 다 웃기는 걸 좋아한다. 이아립이 지나가는 말투로 웃기는 스타일이라면 이호석은 눈 감고 허공을 휘저어 닥치는 대로 웃기는 스타일이어서 공연 내내 어떻게든 웃을 수밖에 없다. 두 사람의 낙천이 듣는 사람을 매혹시키고, 집으로 돌아가는 관객이 “내일은 반드시 놀아야지”라는 마음을 먹게 하는 힘이 있다.
대학 시절에 좋아하던 노래와 지금 좋아하는 노래가 다른 게 아마 그런 이유 때문 아니었을까. 대학 시절에는 음악을 음악으로 대했고 음악의 앞모습만 보았다면, 이제는 앞모습보다 뒷모습 혹은 옆모습을 더 유심히 보게 됐고 음악 역시 사람이 하는 거라는 아주 평범한 사실을 깨닫게 됐다는 차이가 있다. 결국 음악을 듣는 것은 사람을 듣는 거로구나. 결국 책을 읽는 것은 사람을 읽는 것이고, 그림을 보는 것은 사람을 보는 것이구나. 한 10년쯤 지났을 때 <C’est La Vie>는 어떤 노래로 바뀌어 있을까. 그때도 삶을 긍정하면서 “그래, 이게 인생이지” 하는 즐거운 마음으로 이 노래를 들을 수 있을까. 그때는 이 노래를 다 풀고 난 다음일까. 소설가 스티븐 킹의 말 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 “인생은 예술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래, 그게 인생이지.
하와이로 가는 티켓, CD 한장이면 충분하다. 내가 간다, 하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