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얘기하듯 <히트>의 이성한 감독은 충무로의 아웃사이더 같은 존재다. 데뷔작 <스페어>(2008)로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되고 <바람>(2009)으로 다시금 주목받았지만 아직 흥행이라고 할 만한 성적을 거둔 적도, 주류영화계의 입방아에 오르내린 적도 없다. 그런 그가 다시 범죄스릴러 장르 <히트>로 돌아왔다. 어쨌건 그 역시 하나의 장르에 매진하는, 그러면서 그 속에 그만의 색깔을 심어놓는 고집있는 감독 중 하나다. 개봉일 직전까지 자신의 장기라 할 수 있는 액션과 사운드 편집을 마지막으로 손보고 있던 그를 만났다.
-세 번째 영화를 끝낸 소감이 어떤가. 데뷔작이나 두 번째 작품과는 사뭇 다른 느낌일 것 같다. =돌이켜보면 <스페어>로 2007년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됐던 일 자체가 나에게 꿈같은 일이었다. 고등학생 때 영화연구회 동아리에 있으면서 영화과 형들에게 배운 적은 있지만 한겨레영화학교에서 영화를 공부한 게 영화연출 공부의 전부였다. 한겨레영화학교를 수료하고 충무로에 딱히 아는 사람도 없이 맨땅에 헤딩하듯 첫 작품을 만들기까지 6년이 걸렸으니 당시 이상용 프로그래머의 연락을 받았을 때 많이 놀랐다. 그러고 난 다음 다시 호흡을 가다듬고 <바람>을 만들고 여기까지 온 건데, 정말 당신 얘기처럼 세 번째 영화의 느낌은 굉장히 다르다. 시작과 시행착오, 그런 것들에서 벗어나 나만의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부담감이 컸다.
-<히트>는 범죄극이라는 점에서 데뷔작인 <스페어>를 떠올리게 한다. =<스페어> 때의 느낌으로 그보다 더 잘 만들고 싶었다. 당시 시행착오 같은 게 있었다면 더 나은 방향으로 돌파하고 싶었다.
-관객 입장에서는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는 <오션스 일레븐>처럼 배배 꼬인 범죄극을 예상하지 않을까 싶다. =인터넷에 올라오는 초기 반응들을 보니 그런 것 같다. 그래서 아쉬움도 많이 남고. 반면 처음부터 여러 인물들이 등장하는 범죄극을 우리 스타일로 만들고 싶었다. 개인적으로는 <오션스 일레븐> 같은 느낌이 우리와는 잘 안 맞는 옷 같다. 그런 범죄극을 우리 식, 내 방식대로 풀어보려는 시도가 <히트>였다. 나는 <스페어>나 <바람>, 그리고 <히트>가 비슷한 기조로 간 영화들이라고 생각하는데 <바람>을 좀더 좋게 봐준 사람들이 많다.
-아무래도 <바람>은 개인의 내면적 체험이 바탕이 돼서 그런 게 아닐까. 한국 관객은 그런 정서적인 측면을 무척 중요하게 여긴다. =정말 그런 것 같다. 기본적으로 영화를 볼 때 감정이입의 요소나 지점들을 먼저 찾는다는 생각도 들고. 그런 점에서 보자면 <바람>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등의 요소가 있다. 그래서 당시 짱구(정우)의 학교 이야기, 짱구와 아버지의 관계, 그렇게 두 영화를 접하는 것 같다는 얘기도 들었다. 반면 그런 것들은 감독 개인의 스타일과는 좀 거리가 있는 부분이니까 감독이라면 다른 부분들로 평가받고 싶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히트>는 액션적인 부분이 더 정교해졌고 이전보다 웃음의 포인트를 배치하는 감각이 좋아진 것 같다. 특히 한정된 공간인 격투장 장면의 촬영이 궁금하다. =엑스트라 등의 관중을 오전 10시부터 오후 7시까지 4일 동안 동원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한정된 시간 때문에 서울액션스쿨의 강영묵 무술감독이 무척 고생했다. 여러 번의 대결을 서로 다른 스타일로 표현해야 하니까. 결과적으로 비용이나 기간이 오버되지 않고 4일 안에 다 찍었다. DSLR까지 감안하면 총 4∼7대의 카메라를 동시에 돌렸다. 액션 연출에서는 매 결투를 완성하고 다음 결투로 넘어간 게 아니라 마치 진짜 경기하듯이 한 경기 끝나면 다음 경기 시작하는 식으로, 특별한 NG가 없다면 처음에는 일단 쭉 시간순으로 찍었다. 그런 다음 전체적으로 액션의 흐름을 본 뒤 첫 테이크에서 문제된 것을 감안해 다시 찍고, 처음에는 없었던 박치기를 한다거나 스테디캠을 쓴다거나 하는 등 신마다 다르게 촬영했으며, 그렇게 경기마다 캐릭터의 개성이나 스타일이 달라지게 했다.
-세편의 영화를 만들면서 당신의 전매특허와도 같은 스타일이 있다면 바로 액션신에서의 국악 사운드 활용이다. =맞다. 내가 고집 부리는 것 중 하나다. (웃음) <스페어> 때부터 국악을 이용한 액션신에 집착했다. 감정적으로 율동을 돋보이게 하는 효과가 있다. 아무래도 나는 성룡을 좋아하는 사람이어서 그런지 액션신을 풀숏의 롱테이크로 담아내고픈 욕심이 있다. 그럴 때 그런 음악이 더 잘 사는 것 같기도 하고. 액션 연출에 관한 한 나의 확고한 차별점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배우들은 그렇게 긴 호흡으로 찍는 걸 힘들어하더라. 그래서 그 접점을 잘 찾으려고 하는데, 나는 과거 성룡의 <쾌찬차> 등을 보면서 느꼈던 쾌감 같은 걸 아직도 추구하는 사람이다. 가령 TV 음악프로그램에서 아이돌 가수들의 춤을 전체적으로 동작을 음미하며 보고 싶은데, 종종 카메라가 클로즈업으로 쭉 들어가고 앵글을 홱홱 돌리고 할 때 참 답답하다.
-<쾌찬차>에 대한 얘기도 했지만, 그동안 성룡 영화에 대한 애정을 종종 밝혀왔다. =중고생 때 우상이었다. 내가 너무 성룡을 좋아하니까 누나는 왜 그런 영화를 좋아하느냐고 핀잔을 주곤 했다. (웃음) 그땐 극장에서 1년에 100편 이상의 영화를 볼 때였는데 한번은 명보극장에서 <아웃 오브 아프리카>를 했다. 절대 그런 영화를 볼 일 없는데 누나가 그런 영화를 좋아하니까 한번 가서 봤다. 그 영화가 뭐가 좋다는 건지 정말 이해가 안 가더라. (웃음) 물론 지금은 그때의 어린 나와는 다르지만 아무튼 내 시작이 그랬다. <스페어>로 데뷔해 <히트>를 내놓은 지금까지 관객이 편안하고 재밌게 영화를 즐기다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에도 다 성룡의 영향이 크다. 이야기상으로 반전을 거듭하거나 배배 꼬인 것도 없으면서 오락적 요소들로 가득한 영화. 게다가 그의 영화에서 악인은 정말 악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내 영화 역시 그렇다.
-<바람>도 일종의 교내 폭력조직에 대한 얘기라면, 당신의 세 영화 모두 범죄세계를 그리고 있다. 그에 반해 지독한 악당의 존재라든가 끔찍하고 잔인한 묘사 등은 별로 없다. 말로는 손가락이나 팔을 자른다고 하지만 실제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아까 성룡 영화 얘기를 한 것처럼 누구나 자연스럽게 즐길 만한 영화를 추구하는 태도도 있고, 아직은 그런 방식들을 손쉬운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좀 고지식해서 그런지 보이는 대로 전달하고 흥분시키는 그런 방법을 꺼려하는 부분도 있고 감독으로서 치사하고 정정당당하지 않다고 보는 것 같다. 의도적으로 멀리하는 부분이 있다.
-반면 그런 요소들을 관객은 범죄스릴러 장르에서 기대하는 의도된 컨벤션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바람>은 주연배우 정우씨의 자전적 얘기에서 출발했는데, 그와 얘기를 나누다 확 꽂혔던 대목이 뭐였냐면 “그 친구들 다 뭐해요?”라고 물었을 때 “건달 된 사람은 없고요”라고 말할 때였다. 학창 시절에 그렇게 놀던 사람들은 나중에 다 조폭 되고 그럴 거 같은데, 평범하게 어딘가에서 우리 같은 소시민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니 느낌이 확 왔다. 자극적인 면보다는 그런 의외성을 즐긴다고나 할까. 체질적으로 이야기를 꼬는 영화, 뻔한 컨벤션의 영화를 싫어한다. 가령 <식스 센스>를 다시 보면 재미없다. 다 알고 다시 보면 느낌이 현저히 떨어진다. 그래서 그런 영화보다는 단순한 이야기라도 내 색깔로 풀어내는, 2번 보고 3번 보면서 더 많은 걸 발견하고 음미하게 되는 그런 영화를 하고 싶다. 감독이라면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를 끄집어내서 독특하게 재가공하는 능력이 중요한 것 같다. 물론 그게 너무 어렵다. (웃음) 그래서 <히트> 역시 <오션스 일레븐> 같은 스타일로 즐기기보다 다른 부분들을 좀 봐주셨으면 좋겠다.
-이런 범죄 장르에 대한 당신만의 생각이 궁금하다. =내가 생각하는 범죄물의 재미는 인물 대부분이 가까운 사람들의 얘기를 더 안 믿는 경향이 있다는 데서 온다. 가령 가까운 사람 누군가가 뭐가 좋다고 얘기하면 ‘말도 안돼’ 그러면서 딱히 귀담아듣지 않다가, 박사나 잘 모르는 사람이 똑같은 얘기를 하면 다 듣지도 않았으면서 ‘맞아 맞아’ 그런다. <스페어>의 광태(임준일)나 길도(정우), <히트>의 바지(한재석) 모두 현재의 위기를 돌파할 최선의 선택이라고 믿는 게 그런 영화 속의 결정들이다. ‘이러면 안될 텐데’ 하며 사기를 당할 것을 알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는 거다. <히트>의 남자들은 <스페어>보다 좀더 덜떨어지는 인물들이다. 멍청한 인간들이 멍청하게 일을 시작한다. 그런 인물들이 대단한 뭔가를 해내는 이야기라기보다 어떻게 위기를 헤쳐나가는지 지켜보는 재미를 주고 싶었다.
-아무래도 충무로의 아웃사이더 같은 느낌이라 소문도 많은데, 아주 편하게 꾸준히 작업하는 걸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꽤 있더라. =나도 얘기를 전해 듣긴 했다. (웃음) 조폭 자금으로 영화를 만든다느니 의사나 판사 혹은 해외 유학파 출신이라느니 하는 얘기도 들었다. 부모님 반대 무릅쓰고 하던 일 그만두고 한겨레영화학교에 들어갔고 그때 결혼도 했다. 그러다 35살에 준비해 <스페어> 만들면서 참 복합적인 감정이 들었다. 이렇게 말하면 안 믿는 사람들이 많던데 나 역시 어려운 환경에서 마음고생 많이 하며 영화 만든다. (웃음)
-앞서 두편을 함께한 배우 정우와는 잠시 이별인가. =정우씨는 현재 공익근무 중이다. 마음 같아서는 적은 비중의 역할이라도 맡기거나 <히트> 무대인사에도 초청하고 싶지만, 요즘 군복무 연예인들의 외부활동에 대한 말이 많지 않나. 그래서 정우씨나 나나 그러지 않는 게 나을 거 같다고 판단했다. 내년 7월 제대인데 당연히 제대와 동시에 함께 영화를 할 거고 대략 작품 제목은 <일기장>이라고 정했다. 역시 정우씨의 얘기가 많이 녹아들 작품이다. 둘 다 술을 못해서 함께 만나면 새벽까지 찻집만 옮겨다니며 3차, 4차까지 간다. (웃음) 또 준비하고 있는 작품이 김진명 작가의 <카지노>다. 예산이나 캐스팅 등 여러모로 공을 들여야 할 작품이라 긴 호흡으로 내다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