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단편소설 <아기부처>를 원작으로 한 <흉터>는 감정을 억누르고 그저 덮어버리느라 요동치는 선희의 마음을 큰 사건 없이 섬세하게 그려낸 영화다. 무덤덤한 태도만으로, 흔들리는 눈빛만으로 완벽하게 선희가 된 박소연의 이름은 대중에겐 다소 낯설지 모르지만 그녀는 오래전부터 단편영화에서, 연극 무대에서 지속적으로 연기를 해왔다. <겨울나비>와 <흉터>에서 보여준 초췌하고 연약한 얼굴을 떠올렸건만 막상 만나본 박소연의 미소는 딱 가을의 햇살 같다. 환하게 미소 지으며 예쁜 글씨로 꼼꼼히 채워 손수 만든 명함을 건네는 그녀의 모습에선 어느새 선희의 그늘이 걷혀 있었다. 아니, 사실은 선희가 ‘흉터’를 극복하고 현실에 되살아난 것일지도 모른다. 인터뷰 내내 다정다감하고 조곤조곤하게 진솔한 감정을 풀어놓은 배우 박소연을 만났다.
-산세바스티안영화제는 어땠나. 반응이 무척 뜨거웠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현지 분위기가 궁금하다. =매우 좋았다. <흉터>의 한국적 정서를 이해할 수 없어서 관객 반응이 썰렁할까봐 내심 걱정했는데 반응이 예상외로 좋았다. 특히 여성 관객의 호응이 상당했다. 길에서도 자연스레 다가와서 영화 잘 봤다고 말을 걸기도 하고, 캐릭터와 장면에 대해 거리에서 관객과 얘기를 많이 나눴다. 현지 관객이 영화를 정말 사랑한다는 느낌을 받았고, 그 진심어린 눈빛과 박수에 행복한 에너지를 받았다.
-한강의 단편소설 <아기부처>가 원작이다. 원작은 어땠나. =“캐릭터를 파악하기 위해 원작을 읽고 싶겠지만 소설과 영화는 힘을 줘야 할 부분이나 포커스가 다를 수 있다”며 감독님은 원작을 읽지 않을 것을 권했다. 영화 자체에만 집중하기로, 시나리오 안에서만 움직이기로 한 거다.
-그간의 이력이 독특하다. 다방면으로 재주꾼이다. =사실은 연기만 하고 싶었다. 집안의 반대로 (예술고등학교 대신) 외고에서 러시아어를 배웠고, 대학도 다른 전공을 택했고, 직업도 다른 쪽에서 찾았는데 나름대로 연기에 다 도움이 되는 것 같아서 결과적으로는 좋다. 요즘엔 목공을 배우고 있다. 연기 안 할 땐 톱밥 먼지 마셔가면서 공장에서 일을 하거나 인테리어 현장에서 망치질도 한다. 사람들은 배우가 손이라도 다치면 어쩌려고 고된 일을 하느냐 하는데 내가 언젠간 목수 역할도 할 수 있지 않나.
-선희를 연기하고 싶다는 의사를 적극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안다. 선희에게 끌린 이유가 무엇이었나. =‘이건 그냥 내가 해야 돼’ 하는 마음뿐이었다. 머리를 쾅 맞은 듯했다. 선희는 본인의 문제를 스스로가 모르고 산 여자다. 영화는 그걸 크게 표현하지 않으면서도 분명한 핵심을 짚는데 뭐랄까, 치유되는 것 같았다. 나와 선희가 일맥상통하는 부분도 있고, 정서적으로 선희에게 공감을 많이 해서 연기로 잘 풀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욕심이 났다.
-맡아온 역들은 감정적으로 응축된 역이 많았는데, <겨울나비>와 <흉터>에서 본 배우 박소연은 장면 하나하나에 심혈을 기울여 연기하더라. 열정이 상당해 보이는데. =그렇게 생각해주니 정말 감사하다. (웃음)
-<흉터>는 선희가 극의 대부분을 책임지고 있다. 직접 연기한 배우로서 감상은 어떤가. =나와 비슷한 면이 많이 보여서 이 사람이 정말 안타깝다고 생각되기보다는 그냥 마음이 너무 아프고 답답하더라. 뭔가 툭 건드린 것 같은 느낌에 멍했다. 나만 그런가 싶어서 많이 생각을 해봤는데, 누구나 그럴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더라. 선희가 특별한 문제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지금의 이십대, 삼십대 여자 중 한 사람으로 대변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선희를 연기하면서 조금 바뀌었다. 내색하지 않는 게 미덕이라 생각했고, 감당할 수 없는 것을 감당할 수 있다고 착각했다. 시나리오를 보니 이러면 안되지 싶더라. ‘너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봐’ 하는 생각을 했다. 내 삶에 있어 굉장한 계기를 마련해줘서 더욱 특별하다.
-혼자서 끌어오는 연기를 주로 해왔는데, 배우로서 앞으로의 계획은 어떤가. =코미디는 정말 어려운 것 같다. 코미디‘도’ 잘하는 배우가 되고 싶다. 도전해보고 싶고, 지금 나에겐 제일 어려운 연기인 것 같다. 사람들이 나에게 돌을 던지고 싶은 마음이 들 만큼 독한 악역도 해보고 싶다. 궁극적으로는 화려한 스타이기보다 동네에서 마주쳐도 잘 지내냐는 안부를 가볍게 건넬 수 있는 ‘함께 호흡하는’ 배우가 되고 싶다. 배우 시작할 때부터 줄곧 다짐해온 마음인데 이 마음을 잃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