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아프다. 가슴을 저리게 하고 때로는 갈가리 찢어놓는다. 더이상 현실에서 만날 수 없는 사랑이라면 고통은 배가된다. 이를테면 부재의 로맨스다. <도쿄 맑음>에서 사진작가는 자신의 모델이자 부인이던 여성을 한없이 그리워한다. 세상을 등지고 영영 이별한 여인을. 눈앞에 있는 대상이 아닌 심상으로만 오롯이 남아 있는 사랑에 관한 영화라는 점에서 이 영화는 <러브레터>와 흡사하다. 여주인공도 겹친다. 큰 눈망울의 그녀, 조용히 입가에 웃음을 띠우는 것만으로 주변 풍경을 바꿔버리는 마력을 지닌 나카야마 미호가 <도쿄 맑음>에서 이루지 못할 서글픈 사랑에 재도전한다.
<도쿄 맑음>은 예쁜 영화다. 마치 사진첩을 한장한장 넘기듯 정갈하고 세련된 장면이 많다. 도쿄 시내는 물론이고 관광지의 수려한 경치까지 감상할 수 있다. 실내와 실외를 막론하고 은은한 파스텔톤으로 일관하는 색감은 이 영화의 큰 매력이다. 얼핏 다케나카 나오토의 영화라고 믿기지 않는다. <쉘 위 댄스>와 <으랏차차 스모부>의 코믹한 배우로 알려진 다케나카 나오토가 이렇듯 감수성 풍부한 사람? 역시 믿기 쉽지 않다. 그는 베니스영화제 수상작이자 감독데뷔작 <무능한 사람>(1991)에선 만화가 쓰게 요시하루의 삶을 스크린으로 불러들인 바 있는데 <도쿄 맑음>에선 실존 사진작가 아라키 노부요시의 결혼생활을 포착한다. 하지만 딱딱한 전기영화는 아니다. 감독으로서 다케나카 나오토는 <무능한 사람>과 마찬가지로 예술가의 고뇌보다는 실존하는, 혹은 실존했던 인물 경험을 통해 그들 일상의 특정한 ‘순간’을 카메라에 담아내고 싶어하는 것 같다. <도쿄 맑음>에서 그것은 따뜻함을 가장한, 실제로는 상당한 아픔을 동반하는 순간이다. 진행형이 아닌 과거형의 영화이기 때문이다. 감독 겸 배우로도 등장하는 다케나카 나오토는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한 여인을 추억하며 쓸쓸한 독백을 중얼거릴 따름이다. 당신이 내 옆에 있었더라면.
<도쿄 맑음>은 이야기가 다소 단선적이다. 여느 멜로영화처럼 보는 이의 한숨을 자아내고 눈물샘을 자극하는 장면도 없다. 영화 속 나카야마 미호는 서서히 저물어가는 석양처럼 조용한 몰락으로 생을 마무리한다. 전체적으로 영화는 한없이 느릿느릿 진행되다가 어느 지점에서 탁 하고 흐름이 끊겨버린다. 지루하다면 지루할 수 있는 구성이지만 다케나카 나오토는 이같은 느림의 영화에 체념적 정서를 불어넣는다. 영화 결말에서 인물의 감정은 갑자기 폭발직전 상태에 이른다. 일본 멜로영화 고전에서 흔히 발견되곤 하는 처연함의 흔적은 찾기 힘들지만 대신, 애틋함은 든든하게 둥지를 튼다. 극적이라기보다는 은근하고 끈질긴 애정의 흔적이라고 해야 할까. <도쿄 맑음>을 위해 다케나카 나오토 감독은 지인을 여럿 호출했다. 쓰카모토 신야, 수오 마사유키, 나카다 히데오, 모리타 요시미쓰 등 평소 절친한 일본영화감독이 카메오로 얼굴을 비춘다. 쓰카모토 신야는 신나치주의자로 잠깐 등장하는데 얼빵한 연기가 범상치 않다.
일본에서 공개 당시 평가도 좋았다. <키네마순보> 연말 결산에서 평론가가 선정한 일본영화 중 9위, 독자가 선정한 리스트에선 4위에 올랐다. 평론가 다나카 치세코는 “요코라는 캐릭터는 테네시 윌리엄스가 쓴 <유리동물원>의 로라를 연상케 한다”라고 썼다. 영화에서 나카야마 미호는 전성기의 일본배우 하라 세쓰코를 떠올리게 하는 미묘한 표정연기를 과시하곤 한다. 적어도 최근 일본영화에서 나카야마 미호에 버금가는 확실한 존재감을 보여줄 수 있는 배우가 드문 것은 사실이다. 그저 카메라 앞에 서 있기만 해도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그런 존재감 말이다.
김의찬/ 영화평론가 nuage01@hitel.net
사각 프레임 속, 관능적인 그대...원작자 아라키 노부요시
<도쿄 맑음>은 사진작가 아라키 노부요시를 모델로 한다. 다케나카 나오토는 평소 아라키 노부요시와 친분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영화 속 시마즈는 아라키 노부요시라는 인물을 실제보다 미화하는 점도 있는 듯하다. 아라키 노부요시는 관능적인 포즈와 아라키 특유의 예리한 감성이 돋보이는 사진 작품으로 서구에서도 명성을 얻은 인물. 그의 사진은 신체의 특정한 노출은 물론이고 인간 성기를 직설적으로, 때로는 암시적으로 담아내는 경우가 종종 있다. 1940년생인 아라키 노부요시는 치바대학에서 사진과 영화를 전공했다. 대학에 다닐 무렵 프랑스 누벨바그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며 한때는 프랑스영화 마니아임을 자처하기도 했다. 그는 1970년대 이후 부인이 된 요코를 만났으며 그녀를 사진모델로 많은 작품을 찍었다. 신혼여행을 사진집으로 발간한 것은 물론이고 요코의 누드사진을 출판해 물의를 빚기도 했다.
처음에 아마추어 사진작가로 활동을 시작한 아라키가 사진전 공간으로 택한 곳은 주로 도쿄 도심의 라면집. 스스로는 ‘에로 리얼리즘’이라 명명한 일련의 사진전을 통해 아라키는 점차 악명을 얻었으며 뉴욕을 방문하기도 했다. 1980년대 아라키는 일본판 <플레이보이>를 위해 뉴욕 등지 매춘부 사진을 촬영했으며 사진뿐 아니라 출판과 영화, 음악, 광고계로 발을 넓히면서 퍼포먼스 등 다양한 작업을 펼치기도 했다. 1990년대 이후 그의 작업은 다소 주춤하는데 주요한 이유는 1990년 부인 요코의 죽음. 원래 영화 원작이기도 한 <도쿄 맑음>은 어느 잡지에 요코의 글과 아라키의 사진이 곁들여지는 방식의 연재물이었지만 요코의 죽음으로 이 기획은 아라키 혼자 힘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1996년에 아라키는 가수 겸 현재는 영화배우로도 알려진 <어둠 속의 댄서>의 비욕의 사진작업을 통해 다시 한번 명성을 재확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