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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토리얼] 분노의 시대, 분노의 영화
문석 2011-10-03

그야말로 도가니다. 9월22일 <도가니>가 개봉한 직후부터 네티즌은 영화와 원작 소설의 배경이 된 광주 인화학교 성폭력 사건의 재조사를 요구했고 아동대상 성폭력 범죄의 공소시효를 폐지하자는 청원운동에 나섰다. 정치권, 정부, 심지어 경찰까지 나서 호들갑을 떨고 있다. 언론 또한 연일 <도가니>의 여파를 떠들썩하게 보도하는 중이니 영화 한편이 이토록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적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 2주 전 이 지면에 <도가니>에 관해 쓸 때만 해도 이 정도의 파장은 생각지 못했다. 외려 회피하고픈 이 ‘불편한 진실’을 보려는 관객이 그리 많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개봉 전 열린 유료 시사회 관객만도 10만명이었다. 그렇게 영화를 본 관객은 함께 분노했고 입소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 입소문이 특이했던 건 ‘그 영화 재미있어’라는 일반적 형태가 아니라 ‘그 영화 봐야 해’라는 식이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관객은 현실을 직시하기 위해, 현실에 분노하기 위해 극장을 찾은 셈이다.

‘도가니 현상’은 한국 관객의 특성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보통 영화계에선 ‘한국 관객은 판타지보다 리얼리티를 중요시한다’고 말하는데, 개인적으로 이 말은 절반의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이 명제는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한국 관객은 한국영화를 볼 때 판타지보다 리얼리티를 절대적으로 중요시한다, 라고. <전우치> <아라한 장풍대작전>보다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가 각광받았던 것에서도 이 경향은 드러난다. 한국영화 흥행 기록을 갖고 있는 <괴물> 또한 판타지라는 형식 안에 한국사회의 리얼리티를 적나라하게 담은 영화 아니던가. 하지만 <도가니>의 흥행은 이런 틀로 해석되긴 어렵다. 흥행이 국민적 공분과 동반한다는 점에서 이 현상은 정말 독특하다.

생각할수록 이상한 일은 2005년 이 사건이 <PD수첩>이나 <한겨레>에 의해 알려졌을 때, 공지영 작가가 이 사건의 끔찍한 진실과 솜방망이 판결에 분노해 소설 <도가니>를 쓰고 수십만권이 팔려나갔을 때 고요했던 세상이 영화 개봉 직후부터 뜨거운 도가니로 달궈졌다는 사실이다. 영화라는 매체가 즉각적 반응을 일으키는 특성을 갖고 있어서? 영화가 선동적으로 극화돼서? 그보다 나는 우리가 이미 분노할 수밖에 없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경찰, 공무원, 정치권과의 결탁 아래서 벌어지는 온갖 비리와 돈 많고 학력 높은 사람에게 유달리 친절한 사법부, 부와 권력을 가진 세력끼리 잘 먹고 잘 살게 돼 있는 이 사회구조에 대한 분노가 <도가니>라는 영화를 계기로 뿜어져 나오는 건 아닐까.

그게 맞다면 <도가니>는 그 의도와 무관하게 세상을 바꾼 영화로 기록될 것이다. 물론 금세 식어버리는 냄비가 아니라 ‘물질을 융해하거나 배소하는 등의 고온처리에 사용되는 내열성 용기’인 도가니의 열기를 지켜내는 건 우리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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