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회 부산국제영화제가 ‘영화의 전당’ 시대를 연다. 영화제의 오랜 숙원 사업이었던 영화제 전용관인 영화의 전당이 9월29일 개관식을 열게 된 것이다. 바뀌는 건 이뿐만이 아니다. 영화제의 공식 명칭은 ‘PIFF’에서 ‘BIFF’로 바뀌었고, 마켓 관련 행사들이 벡스코에 총집결했다. 그 어느 때보다 굵직굵직한 사안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김동호 전 위원장의 공백을 쉽게 찾아볼 수 없다. 그만큼 부산국제영화제 이용관 신임 집행위원장이 발로 뛰고 있다는 말이다. 덕분에(?) 이 인터뷰도 겨우 성사됐다. 사진은 부산국제영화제 수영만 사무국에서 찍고, 인터뷰는 이용관 집행위원장의 하루 일과가 끝난 밤 10시 서울역에서 이루어졌다.
-부산국제영화제 전용관인 영화의 전당이 완공됐습니다. 영화의 전당은 영화제의 숙원 사업이었습니다. =조명이 켜진 영화의 전당을 처음 봤을 때 가슴이 벅차오르더라고요. 꿈인가, 생시인가 믿어지지 않았어요. 15년이라는 시간이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데, 이렇게까지 성장할 줄 아무도 몰랐던 거죠. 그저 열심히 해보자 그런 거였는데…. 지난주 금요일 김동호 전 위원장님을 모시고 영화의 전당을 둘러봤어요. 좌석, 동선 등 하나하나 브리핑을 했는데, 김동호 전 위원장님께서 ‘아주 좋다’고 흡족해하셨어요.
-영화의 전당 덕분에 상영관이 남포동과 해운대로 나뉘었던 예년과 달리 올해부터는 모든 상영관이 해운대와 센텀시티에 집중됐습니다. =상영관간의 이동거리를 최소화함으로써 관객은 편하게 영화를 볼 수 있게 됐습니다. 영화제 동안 해운대와 센텀시티를 오가는 셔틀버스도 운행할 계획입니다. 남포동 시절은 이제 추억이죠. 다만, 좌석 수가 지난해에 비해 1/3 정도 줄어서 고민이에요. 좌석을 최대한 풀가동하는 시나리오까지 고려 중이에요. 야외상영장의 좌석도 늘려야 하는데, 길이가 아닌 너비로 늘리는 거라 한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영화제의 공식 명칭이 ‘PIFF’에서 ‘BIFF’로 바뀐 것도 큰 변화입니다. =지방 정부의 명칭이 ‘Pusan’에서 ‘Busan’으로 바뀐 게 한 3년쯤 됐어요. 영화제 역시 그 표기법에 따라야 했어요. 이미 ‘피프’는 브랜드가 됐는데 갑작스럽게 바꾸기도 그래서 부산시에 ‘시간을 더 달라’고 요청했어요. 마음의 준비도, 사람들에게 알릴 시간도 필요하니까. 막상 바꾸려고 하니 그냥 이름만 ‘P’에서 ‘B’로 바뀌는 게 아니더라고요. 영화제 로고를 비롯해 전부 새로 작업해야 했어요. 올해 칸과 베를린에서 영문지에 영화의 전당 광고를 내면서 해외 영화인들에게도 변경 사실을 알렸어요. 해외 영화인들은 ‘이름도 비프인데, 비프나 먹자’라는 농담도 던지고. (웃음) 이거 작업하는 데만 1년이 꼬박 걸렸어요. 그럼에도 영화의 전당 개관이라는 좋은 타이밍이 있어서 새로운 분위기 속에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간 여러 호텔 행사장에서 열렸던 아시아프로젝트마켓(APM, 전신은 프로젝트마켓 PPP), 아시아영화펀드(ACF), 아시아영화아카데미(AFA), 부산영상위원회가 진행하는 아시안영상정책포럼 등 마켓 관련 행사들이 모두 벡스코에 집결했습니다. =원래 이 모든 행사가 한자리에 열렸어야 했어요. 그게 마켓이에요. 또 마켓은 영화제와 어울려야 하고. 그러나 지금까지는 그렇게 하지 못했어요. 아시아프로젝트마켓은 마켓대로, 아시아영화펀드는 그것대로 각기 따로 놀았어요. 자기네들끼리 호텔의 좁은 방에서 놀다보니 산업적인 시너지 효과를 내기 어려웠어요. 부산이 마켓을 하는 이유는 한국영화산업과 아시아 영화산업을 연결하기 위해서인데, 한국영화가 침체기로 들어서면서 마켓 역시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어요. 앞으로 영화진흥위원회와 부산영상위원회 등 국내 주요 영화 기관들이 영화의 전당 주위로 모여요. 그 점에서 이번 마켓 관련 행사들을 전부 벡스코에 집결시킨 건 산업적으로 시너지 효과를 내기 위한 준비작업이라고 보면 돼요.
-마켓 관련 행사를 한 공간에 모으는 데 참고한 해외 모델이 있으신지요. =역시 칸과 베를린 그리고 로테르담입니다. 이 세 영화제의 마켓은 부산에 귀감이 되기도, 자극이 되기도 합니다.
-올해부터 학술대회인 부산영화포럼도 열립니다. 어떻게 구상하시게 된 건가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좋은 영화, 대안영화, 예술영화, 독립영화를 근간으로 하지 않는 상업영화는 의미가 없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하고 있었고, 그 점에서 영화제가 영화산업에 어느 정도 기여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과정에서 늘 하나가 허전했어요. 학술, 이론 말이에요. 이것을 충족시켜야 아시아를 대표하는 진정한 자격이 생기는 게 아닌가 생각해왔어요. 10회 영화제 때 학술 관련 행사를 열었는데, 그때는 꾸준히 이끌어갈 동력이 부족했어요. 그런데 이제는 서울이든 부산이든 영화학이 인문학, 사회학과 어울릴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됐거든요. 그러면 해도 되겠다, 예산을 마련해야 되겠다, 해서 부산시와 협찬사와 얘기했고, 예산을 확보했어요. 또 다른 이유는 정체성 문제예요. 사실 저를 비롯해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는 강단과 평론가 출신이에요. 영화잡지에서 출발한 사람들이고. 비평을 기반으로 담론을 생산하지 않으면 산업과 영화 문화는 오래갈 수 없어요. 관객과 언론 역시 배우에게만 치중하고. 1만명 가까이 모일 수 있는 영화의 전당의 공간 ‘빅 루프’와 ‘스몰 루프’는 그야말로 광장이에요. 이곳에서 산업, 예술, 학술, 관객이 한데 모여 아시아 영화산업은 무엇이며, 아시아적인 영화이론이 무엇인지를 논의해보자는 거예요. 그러면 아시아 영화인들이 얼마나 좋아하겠어요. 그간 아시아계 서구비평가나 아시아에서 활동하는 서구비평가가 제 목소리를 낼 수 없었는데, 영화의 전당 시대에는 그게 가능해졌다는 거죠. 또 하나 덧붙이자면 영화를 전공하는 요즘 어린 학생들은 영화 관련 책을 안 읽어요. 이론공부 없이 앞으로 한국영화가 발전할 수 있겠어요? 선배 세대인 우리가 의무적으로 나서서 이들에게 공부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주는 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부산영화포럼은 매년 운영할 계획입니다.
-모든 게 바뀌다보니 집행위원장 입장에서 영화제를 새로 준비하는 기분이겠습니다. =해보니까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김동호 전 위원장님이 그만두시는 건 10회 영화제 때부터 나온 이야기였어요. 언제 그만두실 건지가 중요했어요. 당시 처음 이야기가 나왔을 때 ‘조금만 기다려달라. 대안을 준비하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지만 대안을 찾지 못해 그 죗값으로 제가 하고 있는 건데요. 제가 집행위원장을 하든 하지 않든 이제부터는 김동호 전 위원장님이 하셨던 것처럼 집행위원장이 일일이 리드하는 영화제는 지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새로운 형태로 가야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직을 재정비하고 시스템화해야겠다는 생각. 사실 그동안 이합집산이었잖아요. 열정이나 인간적인 면을 가지고 덤볐으나 산만했고. 그러다보니 프로그래머는 네트워크하랴, 술 먹으랴, 행정하랴, 다 해야 했어요. 그러나 지난 2년 동안 집행위원장의 몫, 프로그래머의 몫, 사무국의 몫, 실장들의 몫, 팀장들의 몫을 잘 분배해 연습했어요. 사무국은 행정과 회계를, 프로그래머로 구성된 집행부는 프로그램 네트워크를 각각 맡기로 한 거죠. 이런 연습이 올해로 3년째인데 이미 사무국장, 실장, 팀장들은 적응이 다 된 것 같아요. 집행위원장인 제가 컨셉만 잡아주면 디테일한 건 각자가 알아서 고민하고 판단하는 방식으로 일처리를 하고 있어요. 앞으로 조직 시스템의 내실을 더욱 강화해 시스템적으로 건강한 모습을 갖추는 게 목표예요.
-집행위원장으로서 제16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가장 주력하는 부분은 무엇입니까. =영화의 전당을 통해 영화제는 하나다라는 것을 보여줘야죠. 지난 몇년 동안의 목표가 그것이고. 하나가 되는 과정에서 많은 아이디어가 쏟아질 것 같아요. 이를테면 영화의 전당 주변을 전부 마켓으로 만든다거나 소외 계층을 위한 프로그램들을 개발한다거나 하는 것 말이죠.
-올해 상영작은 총 70개국 305편입니다. 올해 프로그램의 경향은 무엇입니까. =올해 영화제를 통해 한국과 아시아의 새로운 경향이 확실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지난해 뉴커런츠 부문에서 수상한 박정범 감독의 <무산일기>와 윤성현 감독의 <파수꾼>처럼 최근 한국영화 부문은 독립영화가 강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한국영화산업에 새로운 희망이 될 것입니다. 아시아영화 역시 전세계적으로 가장 역동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특히 일부 지역에 편중된 예년과 달리 올해 영화제에는 중앙아시아, 서남아시아, 동남아시아, 동북아시아 등 다양한 지역적 분포를 보이고 있어요. 월드쪽은 유럽 중심에서 남미, 아프리카까지 포괄하게 됐습니다. 우리 프로그래머들이 남미와 아프리카를 밥 먹듯이 찾아다녔는데, 프로그래머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어요.
-영화제 이후 계획이 궁금합니다. =부산국제영화제가 끝난 뒤 10월, 11월 동안 도쿄국제영화제, 인도 뭄바이국제영화제, 고아국제영화제 등 아시아 각국을 돌아다닐 것 같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인 움직임을 지켜보는 재미가 너무 커요. 아시아라는 단어가 이토록 매혹적일 줄 몰랐어요.
-영화제가 끝나면 가장 하고 싶은 건 뭔가요. =일주일 동안 아무 생각 없이 잠을 푹 자고 싶어요.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