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숏은 시점 숏임을 찍어본 다음에야 실감할 수 있다. 처음에는 푸른 물을 찍고 싶다는 작정이었지만 결국 나는 그 풍경의 끄트머리에 포함되고 싶었던 것이다.
9월8일
여름의 치마꼬리라도 잡아보겠다고 기어코 바다로 갔다. 파랑과 파랑(波浪)이 그리워서 청색증이 올 지경이었다. 내가 엄살을 피우는 동안 결단력있는 친구가 척척 추진하고 핸들을 잡았다. 비가 오리라는 예보는 빗나갔다. 양털구름 깔린 청명한 하늘이 감격스러웠으나 뇌리에 떠오르는 것이라곤 블루 스크린, 크로마키, 그리고 <개구쟁이 스머프>의 흉측한 예고편이 고작이었다. 영화를 경유하지 않고는 직접적 감흥도 끌어올릴 수 없는 빈곤한 상태가 된 걸까. 목적지인 강화에 도착하자 숙소에 딸린 수영장에서 연인들이 수면을 찰싹찰싹 때리며 그리 우스울 것도 없는 일에 깔깔대고 있었다. 예뻤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감독 구경남(김태우) 뒤에서 시시덕거리던 제주도 수영장의 커플이 영화 속에서 나와 우리를 따라와준 것 같아 흐뭇했다. 은막에서 이뤄진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물안경까지 끼고 진지하게 수영하는 이는 나 혼자였지만 꿋꿋이 헤엄치며 <니모를 찾아서>에 나온 도리의 명대사를 되뇐다. “킵 스위밍, 스위밍, 스위밍.” 그래, 물에서도 일상에서도 가라앉지 않는 한은, 떠 있는 동안은 괜찮은 거야. 한낮의 볕이 사위어 투숙객들이 방으로 돌아간 뒤에 휴대폰 동영상 카메라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고요한 오후의 모퉁이들을 숨죽여 찍었다. 분명 ‘무’(無)를 찍었다고 생각했는데 재생하면 프레임 안에는 어김없이 오만 가지 사건이 일어나고 있었다. 물비늘이 뒤채고 바람이 나뭇가지를 어르고, 멀리서 개가 울고 있었다는 사실이, 그제야 보이고 들렸다.
9월13일
연휴 뒤쪽으로 갈수록 머릿속 와이파이 안테나 개수가 줄어드는 게 보인다. 뭘 봐도 적당히 느끼고 넘어간다. 메모도 하지 않는다. 경각심이 일어 놓친 추석영화를 따라잡으러 가까운 멀티플렉스로 결연히 밤마실을 갔다. 심야임에도 약속된 상영시각을 훌쩍 넘겨 광고가 끝없이 계속된다. 영화랑 만나겠다고 팽팽히 긴장했던 신경이 느즈러지기 시작한다. 그러지 않아도 멀티플렉스 계열사의 커피숍과 아이스크림 가게가 있는 로비를 거치고 할인이라도 받을라치면 계열사 통합카드를 신청해야 하는 형편인 관객은, 단관극장보다 점유율이 높다는 이유로 몰린 다량의 광고까지 봐야한다. 나로 말하자면 극장용으로 편집된 긴 버전의 CF를 나름 즐기는 관객인데도 연달아 두세번 같은 광고에 세뇌되는 일은 달갑지 않았다. 영화 타임당 광고 상한편수는 도대체 몇편일까. 드디어 “영화 볼 준비 되셨나요?”라고 CF 모델이 묻기에 반색하며 ‘네!’ 하고 속으로 힘차게 대답했더니 곧이어 “그럼, 노후비용은요?”라고 묻는다. 맙소사! 여러 제품을 빌려 반복되는 극장 에티켓 캠페인을 보며 투덜거렸다. 극장도 극장예절을 지켜주면 고맙겠다고. 이건 시장의 독점일 뿐 아니라 임의로 시간을 훔치는 일이다.
<푸른 소금>을 보았다. 좋은 캐스팅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캐릭터가 요구하는 속성을 이미 보유하고 있는 배우를 얻었다면 그 행운을 십분 이용해야 지혜롭지 않을까? 구태여 온갖 설정과 메이크업과 의상, 헤어스타일까지 총력을 기울여 “나 이런 인물이에요”라고 역설하면 오히려 가짜가 아닐까 의심이 돋게 마련이다. <푸른 소금>의 다른 약점은, 두 도시를 오가는 인물의 이동을 제시하는 방식이 때때로 무성의하고 서사의 고비가 되는 일화들이 편의적으로 배치돼 있다는 점이다. 세빈(신세경)은 왜 갑자기 아파 쓰러지는가? 킬러는 왜 결정적인 순간에 믿을 수 없는 세빈에게 두헌(송강호)을 제거하는 기회를 양보하는가? 제작진 입장에서는 열쇠로 정한 이미지와 정서가 가장 중요할지 몰라도 받아들이는 관객에게 정서는 영화적 장치의 결과이지 동기가 아니다. 뮤직비디오가 아닌 영화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예컨대 두헌이 살벌한 조직원 모임에 나가 세상에서 중요한 금의 첫째는 황금, 둘째는 소금이라고 일갈한 다음 “세 번째로 중요한 금은 바로 지금입니다. 지금 뭣들 하고 계십니까? 만길 형님 죽인 놈을 찾아야 할 거 아닙니까?”라고 내뱉는 대사를 곱씹어보면 앞의 세 가지 금 이야기가 언급될 필요는 논리적으로 없다. 영화의 제목이 <푸른 소금>이고 마지막에 푸른 염전의 매혹적 이미지가 나와야 한다는 설계만 제외하면.
모든 영화에서 리얼리티의 레벨이 높을 필요는 결코 없지만 적어도 그것은 균일해야 한다.<푸른 소금>은 이 지점에서 흔들린다. 물론 어떤 관객은, 표적과 사랑에 빠진 킬러가 팀이 되어 거대조직에 맞서 싸운 이야기로부터 한때 유행한 <투 헤븐>류의 뮤직비디오 내러티브를 읽어내고 거기에 맞춰 사실성에 대한 기대치를 조정할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푸른 소금>은 보다 두터운 이야기를 의도하지 않았던가? 배우 송강호는 이 균열을 아이러니로 돌파해나가려고 하는데, 그 분투는 안타깝게도 영화를 완전히 추동하는 데에는 이르지 못하고 영화를 극복하려고 애썼다는 인상을 남긴다.
9월14일
<푸른 소금>이 끝나자마자 <통증>의 객석에 슬라이딩했다. <통증>에서 심리적, 육체적 상처로 통각신경에 문제를 일으킨 남자로 분해 멜로 연기를 보여준 권상우는 어느새 기술적으로 상당히 세련된 배우가 되었음을 입증한다. 그가 연기하는 남순은 자해는 해도 남을 때리지는 못하는, 아프고 슬픈 사내다. 그러나 보는 입장에서는 자해도 남을 때리는 것만큼이나 폭력적이다. 처음에는 그의 고통에 교감하느라 괴로웠고, 나중에는 ‘그렇게 아프기를 원한다면 신경 쓰지 않을게요’라는 마음이 들어 다른 식으로 괴로웠다. <통증>을 보며 눈물 흘렸지만 내겐 영화 자체가 극중 시위현장에 등장하는 ‘등신불’로 보였다. 위압적인 자해로 이후의 어떤 논의도 일축 해버리는. 우리가 뭐라 더 말할 수 있겠는가?
<통증>과 <푸른 소금>은 이즈음 한국 멜로영화가 몰린 낭떠러지를 시사하는지도 모르겠다. 사랑이 죽고 죽이는 일과 직결되는 처절한 시추에이션이 아니면 더 이상 러브 스토리는 관객의 심금을 건드리지 못한다는 두려움이 감지된다. 우리는 극한에 몰리지 않으면 사랑이란 행위를 할 수 없게 된 걸까.
9월15일
<코쿠리코 언덕에서>는 1960년대 초반의 요코하마에서 펼쳐지는 단카이 세대의 성장담이다. 지극히 일본적인 이야기를 소재로 취하는 지브리 스튜디오의 고집이야 주지하는 바이지만 현재 60대 중반인 일본인들의 청춘 시절을 21세기 극장용 장편으로 만들다니 매우 용감한 선택이다. 요컨대 그 시절은 소년이 교지에 시를 투고해 소녀에게 관심을 전했던 시대고, 급우들과의 합창이 뭔가를 의미했던 시대였다. 미야자키 부자의 메시지는 명료하다. <코쿠리코 언덕에서>의 남녀주인공을 포함한 학생회 멤버들은 구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마구잡이로 휩쓸려 가는 소중한 전통을 지키려고 투쟁한다. 급진적 퀴어 감독 데릭 저먼이 르네상스 시대에서 이상을 구했듯, 지브리는 격세유전에서 소중한 무엇을 건져내려 하고 있다. 그런데 <코쿠리코 언덕에서>의 서사는 사춘기 소년, 소녀의 사랑에 출생의 비밀을 개입시키면서 중심을 흐리고 만다. 그 패착이 너무 선명해 이야기의 초점이 불명확한 많은 경우 그렇듯 혹시 실화에 기초한 영화인가 싶었지만 원작은 80년대 순정만화다. 출생의 비밀이 <코쿠리코 언덕에서>의 약한 고리인 이유는 단지 이 서브플롯이 막장드라마의 상투형이라서가 아니라 톤을 어지럽힐 뿐 이야기에 실질적으로 더해주는 바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이 영화에서는 애니메이션만이 가능한 대담한 시정(詩情)이 활개를 펴지 못하고 있다. 사실적인 이야기의 특성상 지브리 특유의 광기를 발현하긴 어려웠다 해도 <코쿠리코 언덕에서>는 서정성의 구현에서도 오래전 나왔던 <귀를 기울이면>이나 <바다가 들린다>를 넘어서지 못한다. 대세를 거슬러 핸드드로잉에 기초한 2D애니메이션과 전통적 감수성과 가치에 착목한 작품을 밀어붙이는 지브리 스튜디오의 소신은 귀하지만 <코쿠리코 언덕에서>는 그들이 너무 앞질러 스스로를 장렬히 멸망하는 종족으로 규정하고 그 역할에 몰입하느라 다른 가능성을 놓치고 있지 않나 하는 우려를 불러일으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