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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현진의 미드 앤 더 피플] 삼선 추리닝의 절대 포스
안현진(LA 통신원) 2011-09-30

에미상 시상식의 사회를 맡은 <글리>의 제인 린치

<글리>

LA에는 늦여름이 기승이다. 아침저녁으론 쌀쌀하다 싶지만 정오가 되기 전 뜨겁다 못해 따가운 태양이 작열한다. 미국은 노동절을 가을의 시작으로 간주한다는데, 노동절인 어제를 보내고 난 오늘 오전 11시, 온도계는 35도를 가리켰다. 복사열이 가장 뜨겁다는 오후 2시의 온도는 알고 싶지도 않았다. 계절은 더뎌도, 방송가의 스케줄은 어김이 없다. 방송가에 가을이 왔음을 알리는 한 가지 지표는 바로 에미상 시상식인데, 슬슬 거리에 붙은 광고판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선방한 TV시리즈가 손에 꼽히는 수준이라 기대는 크지 않지만 트로피와 레드카펫이 만들어내는 축제 분위기는 무시하기 힘들다. 그런데 빈약한 밥상에도 이 시상식을 기대하는 이유가 있다. 바로 사회를 맡은 제인 린치(Jane Lynch) 때문이다.

제인 린치는 초대형 프랜차이즈로 발돋움한 <FOX>의 뮤지컬 TV시리즈 <글리>(Glee)에서 치어리더 클럽의 포악한 코치 수 실베스터를 연기하며 유명세를 얻었다. <글리>는 흑인, 아시아인, 유대인, 왕따, 장애인, 미혼모, 10대의 동성애 등 일반적인 TV시리즈가 피하는 주제들만 골라 담은 용기에 훌륭한 선곡이 더해져 큰 호응을 얻었지만 유치하고 비현실적인 쇼비즈니스의 속성과 서사와 노래를 연결할 때 발생하는 분절적 구조 등을 빌미로 야유를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어쨌든 <글리>는 현상을 넘어 신화가 됐다. 미국 전역의 고등학교에 ‘글리 클럽’ 유행을 창조했고, 드라마에서 공연된 음악은 원곡과 리메이크 모두 차트의 상위를 점령했다. 수록곡 컴필레이션 음반들도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노래도, 배우도, 제작자도 어느 것부터 건드려야 할지 난감할 만큼 커버린 <글리>는, 판도라의 상자나 다름없었다.

“<글리>를 참아낼 유일한 이유.” <LA타임스>의 TV평론가 메리 맥나마라는 제인 린치를 이렇게 평한다. <글리>의 무대는 오하이오주 리마라는 소도시에 자리한 매킨리 고등학교다. 이 학교에는 법도 도덕도 통하지 않는 무법자가 있었으니, 바로 코치 수 실베스터다. 180cm의 장신에 벌어진 어깨, 앙 다물어 주름이 지는 턱, 푸석한 머릿결, B사감의 서양 버전이라고 하면 딱일 것 같다. 못된 것까지 당당한 그녀는 덩치 큰 남학생을 복도에서 밀쳐 넘어뜨리고, 교장을 협박하며, 틈만 나면 글리 클럽을 없앨 음모를 꾸민다. 그런데 최약체들이 똘똘 뭉친 글리 클럽을 밟고 또 밟는 그녀가 이상하게 밉지 않다. 드라마 자체의 코믹한 분위기도 한몫하겠지만 그보다는 수의 뻔뻔한 솔직함 때문인 것 같다. 터놓고 말해서 글리 클럽의 구성원들은 찌질하다. 그리고 찌질한 걸 찌질하다고 말할 수 있는 캐릭터는 <글리>에서 수 실베스터뿐이다. 수의 생각과 말과 행동 사이에는 여과가 없다.

제인 린치 역시 수 실베스터 캐릭터를 처음 만났을 때 고민하지 않았다고 한다. 캐릭터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 건 인터뷰에서 연기론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다. 무려 100편이 넘는 필모그래피를 가지고도 데뷔 30년이 지나서야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시작한 린치는 그저 감각이 이끄는 대로 연기했고, 게스트 출연에서 고정출연으로 영역을 넓혀갔다. 다른 출연진들과 달리 가창력도 춤실력도 검증받지 않았지만 언젠가 자신만의 넘버를 부르는 날이 올 것을 예감한 50살의 레즈비언 액티비스트는 매일 세트에 출근해 다른 배우의 뮤지컬 장면을 허밍으로 따라 부르며 그날을 준비했다. 결과는 올리비아 뉴턴 존의 <Physical>과 마돈나의 <Vogue> 장면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수의 넘버는 그린치로 분장해 글리 클럽의 크리스마스를 테러하는 장면이다. 익살맞고 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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