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고흐, 끈이 달린 구두, 1896년(왼쪽). 박원순 변호사의 구두, 사진가 조세현의 트위터, 2011년(오른쪽).
몸단장에 가세하는 패션잡화 가운데 인체 밑단을 점하는 신발은 시야에서 가장 소외된 위치를 차지하지만 그 위상마저 바닥인 건 아니다. 유별난 캐릭터를 배로 부풀릴 소품으로 부족함 없음이 왕왕 입증된다. 과잉된 디자인 구두에 의존한 레이디 가가의 캐릭터는 공공장소에서 바닥에 자빠지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하지만 발 밑에 깔린다는 처지에 빗대 신발을 모욕의 상징으로 간주하는 문화권도 존재한다. 총검으로 직접 상해를 가하진 않아도 상대에게 투척될 때 요긴한 모욕의 방편으로 신발은 돌변한다. 바그다드에서 기자회견 중이던 임기 말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은 참석자의 신발 세례를 받았다(그 대가는 커서 신발 투척 기자에게 3년형이 선고되었고, 논란 끝에 9개월 복역 뒤 석방되었다).
조지 부시 신발 테러 사건, 2008년(왼쪽). 레이디 가가의 굽없는 구두와 공항에서 넘어진 소동, 2010년(오른쪽).
작품 해석의 책임을 논평자의 주관이 아닌 “그림이 말을 건넸다”며 작품에 떠넘기는 때도 있다(많다). 반 고흐의 낡은 구두 그림은 학자들의 논쟁으로 유명세를 날렸다. 해석학자 하이데거는 그림 속 구두가 농촌 아낙의 구두로 농가의 궁핍과 노동의 피로를 “그림이 말해준다”고 주장했다. 미술사가 샤피로는 그림 속 구두가 몽마르트르에 살던 반 고흐 자신의 구두여서 그려진 구두는 화가의 초상화라고 반박했으며, 해체주의자 데리다는 그림 속 구두가 한 켤레가 아니라 왼쪽 신발 두짝인 것 같다며, 구두-주인의 귀속관계를 둘러싼 단정적 해석을 무한히 지연시킨다. 한편 그 무렵 반 고흐가 파리 벼룩시장에서 ‘착용이 아닌 정물 소재’를 목적으로 낡은 구두를 구입했다는 자료도 있다. 반 고흐의 구두 그림(여러 점을 남겼다)이 일으킨 논쟁의 발단은 구두와 주인의 귀속관계에서 비롯된 건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구두 주인이 명명백백하게 드러난 사건은 해석의 난이도가 낮아진다. “이분이라면 밀어드리겠다”며 안철수 원장이 양보하면서 서울시장 보선 무소속 단일후보가 된 박원순 변호사는 단일화 발표 하루 뒤 그가 착용한 구두 때문에 인구에 널리 회자되었다. 이 구두 소동을 보며 반 고흐의 낡은 구두 그림을 둘러싼 식자의 학술 논쟁을 떠올린 미술사학자들도 많았으리라. 사회적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낡고 초라한 구두가 큰 감동을 안겼다. 문제의 구두 귀속자는 명확했다. 박원순이라고 ‘사진’이 입증했고 소수 학자 그룹이 아닌 불특정 대중이 SNS를 매개로 확인하고 촌평을 남겼으며, 이 전 과정을 다시 매스미디어가 정리 보도했다. 귀속자가 명백한 낡은 구두 사진이 남긴 정서의 파도는 사전에 계산하지 않은 정치적 지지를 끌어냈다. 발목 아래 장식에 천착하는 유명 인사나 한 켤레 신발의 누추함에 감동받는 대중과 달리 화제의 구두를 평소 태연히 착용하고 다닌 주인은 신발을 이동도구 이상으로 간주하지 않았고 그 외관에 개의치 않은 것 같다. 정작 세심한 주의가 필요한 문제는 발목 아래가 아니어도 세상에 산재했다고, 그가 진술한 적은 없지만 남이 몰래 촬영한 그의 해지고 말없는 구두가 시위하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