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2
배우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3)
정리 김혜리 사진 손홍주(사진팀 선임기자) 2011-09-29

고현정의 '쪽' ♥ 두번째 만남, 동양학자 겸 칼럼니스트 청운(靑雲) 조용헌

은장도를 가지고 다니세요

고현정_사즉생인가…. 선생님은 어떤 나무 좋아하세요?

조용헌_소나무, 느티나무, 대나무. 그 중에서도 대나무의 솨솨하는 댓잎소리는 약간 음산할 수도 있지만 그를 빗소리 대신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죠. 사시사철 잎이 지지 않으니 저녁이면 새들이 깃들어 잠을 잡니다. 게다가 옛날에는 대나무가 빽빽이 우거져 있으면 호랑이가 뚫고 들어오지 못했어요. 허리를 S자로 꺾지 못하니까. (웃음) 집을 가리고 싶을 경우에도 대나무를 심으면 빨리 자라 2, 3년 만에 가려줄 수 있어요.

고현정_그럼 우리나라 산 중에는 어떤 산을 좋아하고 즐겨 찾으세요?

조용헌_나를 품어주고 달래주는 지리산이 좋습니다.

고현정_지리산도 힘들겠다. 품어줄 사람이 많아서. (좌중 웃음)

조용헌_요즘은 한 5천명 될 겁니다. 둘레가 500리니까 10만명 들어가도 괜찮아요. 지리산에 가면 자살하는 이 없고 굶어죽는 사람 없다고 하죠. 몸이 처질 때는 바위산인 설악산, 북한산이 좋고 허탈하거나 우울할 때는 흙이 많은 오대산, 지리산이 좋습니다. 계룡산도 명산이죠. 저기 나무 사이로 보이죠? 그런데 우리 이야기가 너무 중구난방이네.

고현정_제가 그렇죠, 뭐. (한숨)

조용헌_현정씨는 생활소품이나 액세서리 중에 어떤 물건을 좋아하십니까?

고현정_가방도 좋아하지만 저는 (작은 손수건을 꺼내며) 이런 천들을 좋아해요.

조용헌_촉감 때문입니까?

고현정_음… 더러워지면 제가 빡빡 씻어 말릴 수 있어서요. 혹시 여자가 꼭 가지고 다녔으면 하는 물건이 있으신가요?

조용헌_1번 은장도. (좌중 폭소) 왜냐고? 공격과 수비를 위해서죠. 남자는 주먹이 있으니까. (웃음)

고현정_(판단력도 있다고 하셨으니) 전 이제 은장도만 갖추면 되겠네요. 실과 바늘은 지금도 꼭 갖고 다니는데!

조용헌_허허, 이제 천 말고 칼 가지고 다니십시오.

고현정_선생님은 어떨 때 가장 화가 나세요?

조용헌_자존심 상할 때죠. 그런데 화를 내면서도 성내는 나를 쳐다보는 또 다른 내가 있습니다. 그러면 아무래도 과잉행동이 줄어듭니다. 하지만 사람은 어느 정도 화도 내야 자기를 방어합니다. 무골호인으로만 살면 힘들어요.

고현정_무골호인은, 주위가 힘든 것 같아요.

조용헌_무골호인은 큰일을 못합니다. 사람을 죽이는 칼을 도(刀)라 하고 살리는 칼을 검(劍)이라 해요. 그래서 살인도와 활인검이 있어요. 종양을 떼내는 칼은 활인이고 목을 치는 칼은 살인이죠. 도검을 자유자재로 휘둘러야 큰일을 해요. 장수라면 살인도도 갖고 있어야 함부로 못 달려듭니다. 조폭은 칼로 바로 찌르는 자고 장군은 뽑지는 않고 손잡이를 만지작거리기만 하는 사람입니다.

고현정_어디 가야 그런 장군을 만날 수 있을까요? 그분들은 아주 드문가요, 아니면 계시는데 저 같은 사람은 못 보는 건가요? 혹시, 선생님은 장군 아니신가요? (웃음)

조용헌_저는 장군들의 관전평을 쓰는 사람이죠. 차범근은 아니고 신문선입니다. (좌중 웃음)

고현정_축구 좋아하세요?

조용헌_관전하기에는 야구가 더 재미있습니다. 작전의 범위가 넓으니까요. 번트도 대고 도루하다 죽기도 하고.

고현정_예스! 저는 투수가 던지고 타자가 치려고 할 때 모든 주의가 확 한 지점으로 모여드는 장면, 그 순간이 너무나 짜릿해요. 작전에 따라 외야 수비가 약간 들어오기도 하고요. 야구는 기다리는 시간도 많고 어딘가 한산하지만 그 에너지들이 어느 순간 좍 모여요.

조용헌_묘한 미학이군요. 팽팽한 긴장감을 즐기시는군요.

고현정_야구는 축구에 비하면 열심히 달리는 경기는 아니잖아요. 타자들의 연습 스윙이라든가 그런 시간들이 제가 하는 일과 비슷한 면이 있어요. 그리고 어린 시절 추억도 있어요. 오후 야구중계가 있는 주말이면 아빠가 재래시장에서 닭을 예약해놓았다가 받아와 닭죽을 쑤셨어요. 서울분인 어머니는 그게 싫어 외출해버리셨고요. “딩딩” 소리와 함께 중계가 시작되고 7, 8회 말쯤 되면 죽이 다 끓어요. 아빠가 닭가슴살을 일일이 발라 “이제 먹자”고 들고 오셨죠. 그 냄새와 기억이 좋게 남아서 지금껏 야구에 끌리는지도 몰라요. (웃음)

철저히 이중적으로 사세요

조용헌_현정씨는 인기가 뭐라고 생각합니까?

고현정_인기는… 세금과도 같은 것 같아요. 얻으면 뭔가를 치러야 하는.

조용헌_뒷장에 세금 계산서가 붙어 있군요.

고현정_인기를 원하면서도 막상 인기가 오면 불평하고 있는 저를 발견해요. 그래서 빨리 세금 내듯 뭔가 치러서 초연해지고 싶기도 하고 떨궈버리고 싶은 부분도 있어요. 그러면서도 없어서는 안될 무엇 같기도 해요. 인기 때문에 제 곁에 늘어난 ‘식구’들도 있으니 나 몰라라 할 수도 없고요.

조용헌_연기자의 길을 걷게 된 것이 팔자소관이라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본인의 의지와 노력이라고 여기나요?

고현정_(곰곰 생각) 반반인 것 같아요. 하다 보니 팔자인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오히려 그래서 아주 못되게 팔자가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일부러 다른 걸 욕심내기도 해요. 말년에는 다른 공부를 할 수 있을지 몰라라고 생각하기도 하고요. 근데 그건, 어쩌면 더 팔자라고 느낀다는 뜻이겠죠? 선생님, 배우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조용헌_철저히 이중적으로 살아야죠.

고현정_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는 거죠?

조용헌_노출되는 상황에선 거기에 맞춰서. 스위치를 딱 내리고 사생활 모드로 전환됐을 때에는 편하게 살 수 있어야죠. 매 순간 ‘나는 배우다’라고 생각하고 살면 병이 옵니다. 스마일 콤플렉스죠. 줄곧 미소짓고 얼굴에 “나 교양”이라고 쓰고 다니면 어느 날 약 없이 잠들 수 없게 돼요. 그나저나 나는 누가 이래라저래라 하면 참지 못하는데 배우는 그것이 생업이니 엄청난 수양이 아닌가 싶습니다.

고현정_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연예인이 된다는 건 본인이 그런 일을 원해서일 경우도 있거든요. 그런데 막상 그리 되고 나면 귀찮아하고 불평하는 친구들을 봐요. 그런 걸 보면 야단치고 싶기도 해요. (웃음)

조용헌_현정씨 취미는 뭡니까.

고현정_남편 있는 줄 알고 살림하기요. (좌중 폭소) 농담 아닌데? 정리정돈하고 멸치 머리 떼고 똥 빼고, 누가 보면 곧 남편이 올 것 같아요. 혼자 사는 여자가 저럴 리 없는 거죠. (웃음) 특기는 안 물어봐주세요? 전 하도 옛날에 데뷔해서 그런 거 아무도 안 물어봐요.

조용헌_특기는 뭡니까.

고현정_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요.

조용헌_허허,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사람이 다 실수하고 외양간 고치는 겁니다. 자기 몸을 상하는 큰 실수를 제외하면 다 용납할 수 있는 실수입니다. 배우로서 성취감을 느꼈을 때는 언제인가요? 배우하길 참 잘했다고 느껴 행복했던 순간 말입니다. 상을 받았을 때라든가.

고현정_정말 상은 관심이 없고요. 저는 성취감도 별로 없는 편이에요. 다만 <모래시계>에서 “동일방직 직공들 시위하는데 나, 쌀 샀다?” 하는 혜린의 대사를 하는데 나도 모르게 찡하고 올라와서 한번에 촬영이 끝난 적이 있어요. 그때 작은 짜릿함이 있었고요. <선덕여왕>에서도 몇몇 대사를 하는 순간에 시원함이 있었어요.

조용헌_살면서 가장 어려운 대목이 무엇입니까? 판단을 내려야 할 때?

고현정_아뇨. 판단은 다 하고 있어요. 판단대로만 갈 수 없고 상황에 맞게 타협을 봐야 한다는 점이 어렵죠.

도화살이 아니라 천을귀인입니다

고현정_선생님 책을 보면 다실(茶室)을 예로 들면서 집 안에는 신성한 장소가 한 군데는 있어야 한다고 쓰셨어요. 거기에 대해 말씀을 더 듣고 싶었어요. 요즘은 인테리어 디자인이니 뭐니 해서 잊고 사는 부분인 것 같아서요.

조용헌_신성한 공간이 있어야 자기를 정화할 수 있어요. 사람으로 치면 나를 전적으로 알아주고 격려해주어 마음을 정화해주는 큰 인물을 만나는 것과 같죠. 어쩌면 그게 신(神)입니다. 다실에서 차를 마시면 향도 맡아보고 혀로 맛도 보고 무쇠주전자에 물이 보글보글 끓는 소리를 산속의 폭포수 소리로 여기게도 됩니다. 차를 우리고 잔에 옮기는 과정은 긴장은 없지만 집중을 요구해요. 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동안 다른 걱정이 줄어듭니다.

고현정_신성스런 공간은 작아도 괜찮은 것이죠?

조용헌_괜찮습니다. 오히려 작아야 압력밥솥처럼 기운이 꽉 찹니다. 큰 방에서 살면 단명한다는 말도 있어요. 자금성에 가봐도 황제가 자는 방은 작습니다. 침실은 작을수록 좋고, 기를 뺏기지 않도록 텔레비전이나 많은 물건을 놓지 않는 게 좋아요. 즐겨 보는 책 한권과 물 주전자 정도. 천장도 너무 높으면 안 좋아요.

고현정_선생님, 누군가가 제게 도화살이 많다던데요.

조용헌_하하. 도화살이 아니고 아까 말한 천을귀인, 천을성이 비추는 겁니다. 하늘이 보호하고 사람이 따라요. 세금 계산서라고 말했죠? 오늘 한 초식 배웠네요. 정확한 표현이었습니다. 현정씨에게 오늘 받은 인상은 재색을 겸비했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보호할 지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고현정_(웃음) 그러니까 은장도만 사면 되는 거죠?

조용헌_(크게 끄덕이며) 은장도만 사면 돼요.

고현정_사이즈는….

조용헌_(기다렸다는 듯) 대, 중, 소 세 가지. 술은 빨강, 파랑, 노랑으로 달아서. (좌중 폭소)

고현정_(웃음) 안 물어봤으면 NG죠, 선생님?

조용헌_틀림없이 물어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고현정의 선물

to. 조용헌<돌아오라 소렌토로> <금발의 제니> <산타루치아>. 고현정이 조용헌 칼럼니스트에게 선사한 CD 트랙 중 일부다. 젊은, 아니 앳된 이미자의 사진이 오리지널 표지에 들어 있는 이 음반에는 잠자리 날개처럼 고운 어린 프리마돈나의 목소리에 실린 옛 노래들이 담겨 있다. “<즐거운 나의 집>이 그렇게 슬픈 노래인지 몰랐어요.” 최근 집을 뒤집어엎다시피 정돈하다가 어느 조각가로부터 선사받았던 이 CD를 다시 발견했다는 고현정은, 사라진 시간을 경애하는 인터뷰이와 명재 고택의 주인장에게 그리움의 정서에 물든 이 한 타래의 음악을 다시 선물했다. 아주 수줍은 표정으로.

관련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