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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2)
정리 김혜리 사진 손홍주(사진팀 선임기자) 2011-09-29

고현정의 '쪽' ♥ 두번째 만남, 동양학자 겸 칼럼니스트 청운(靑雲) 조용헌

조용헌_나는 동양철학을 공부하고 고리타분한 사람인지라 보자고 하는 분들이 주로 중년 남자들인데 이거 참 전혀 안 어울리는 조합이 아닌가 싶습니다. (웃음)

고현정_하지만 제 입장에서는 선생님을 뵙자고 청한 과정이 자연스러웠어요. 올여름 비 피해로 집들이 무너지는 광경을 TV에서 계속 봤는데 며칠 흐른 뒤 선생님이 집의 의미에 관해 쓰신 책 <백가기행>을 제가 읽고 있더라고요. 물론 그전에도 신문 연재 칼럼과 저서의 독자였고요. 명사들을 동물에 빗댄 글도 재밌게 읽었어요. 최근에는 안철수씨를 곰에 빗댄 글이 기억나요.

조용헌_코알라가 곰 됐다고 썼죠. (웃음) 내가 지금까지 만나고 인터뷰한 사람들은 고승이나 샤먼 같은 ‘마법사’들, 아니면 정치인이나 CEO이었는데 여배우는 처음입니다.

고현정_마법사들을 만나면 주로 어떤 질문을 던지세요?

조용헌_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사후 세계는 무엇인가를 묻죠. 영혼이 육신이라는 번데기를 벗어날 때는 한 30분만 괴롭고 그러고 나면 다른 세상이랍니다. 차원의 변화만 있을 뿐 죽음은 없다는 거죠.

고현정_그럼 경영인들에게는 뭘 물으세요?

조용헌_언제 죽고 싶었는지 물어요. 사업하다보면 고비가 오게 마련이니까 투신하고 싶다거나 음독하고 싶은 경험을 두세번씩 하거든요. 즉, 그 질문은 언제가 당신 삶에서 가장 어려웠고 어떻게 돌파했느냐를 묻는 것이죠. 내 관심사는 생과 사를 어떻게 돌파하느냐의 문제니까요. 그런 위기를 돌파하려면 내공이 필요한데 내공은 피와 땀, 눈물, 세 가지 액체를 흘린 양에 비례합니다. 그래서 이 셋을 별로 안 흘리고 살아오다 큰 위기를 만나면 주저앉곤 하죠.

고현정_땀과 눈물은 좀 알겠는데 피는 어떻게 흘리나요, 선생님?

조용헌_수술대 위에 한번 올라가보는 겁니다. 전신마취에 들어갈 때 내가 깨어날 수 있을지 온갖 생각이 들죠. 거기 한번 오르는 경험으로 많은 내공이 쌓입니다.

고현정_그럼 선생님께서는 건강상 위기를 겪은 적이 있나요?

조용헌_5년 전에 글 쓰는 일의 과로로 심장에 압박이 와서 고생했죠. 그럴 때는 일을 줄여야 하는데 누구나 살아온 시스템의 컨베이어 벨트가 있기 때문에 막상 줄이기가 힘듭니다. 시속 100km로 달리는 기차에서 뛰어내리는 심정이어야 하는데 아래 강물이 흐르는 철교에서 뛰어야지 맨바닥에 뛰어내리면 다치는 거죠. 그런가 하면 사람이 위기상황을 돌파할 때에는 보호령들이 선몽(先夢)을 통해 나타나기도 합니다.

고현정_특별한 사람한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 집중하면 보이는 건가요?

조용헌_한국사회에서 성공한 인물의 특징을 보면 첫째 직감이 발달해 있고, 둘째 보호령이 있고, 셋째 사소한 일에 삐치지 않습니다. 보호령은 꿈을 통해 나타나기도 하는데, 혹시 현정씨는 신령스런 꿈을 꾼 적이 있습니까?

고현정_딴에는 몇번 있다고 생각해요. 여덟살 무렵 친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온갖 집기들이 금붙이로 돼 있는 방 구들장에 깔린 붉고 두툼한 보료 위에서 할머니가 저를 안고 계시는 꿈을 꿨어요. 할머니는 결혼 뒤 얼마 안돼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스님처럼 평생을 사신 분이었어요. 이상하게 집안에 여자 어른들이 돌아가셨을 때마다 꿈을 꿨어요. 중학교를 다니며 큰 고모님을 여읠 무렵에는 그 댁이 꿈에 보이면서 장롱에 있는 귀한 물건을 누가 가져가는 걸 봤어요. 아버지께 말씀 드려 가봐야겠다고 했는데 정말 거기서 그 물건들이 나와 지켜낸 적도 있죠. (웃음)

조용헌_할머님이 고현정씨를 지켜주시는지도 몰라요. 인간이 혼자 사는 것 같아도 산 자와 영혼들이 힘을 합쳐나가면서 가는 겁니다.

고현정_선생님의 자문을 구하는 힘있는 사람들, 정치인이나 사업가들은 무엇을 원하던가요? 어떤 불안인가요?

조용헌_첫째는 집터. 우리나라 CEO들은 집터를 잘 못 들어가면 망할 수 있다고 믿어요. 다음은 자녀 교육에 관한 고민이 많았습니다. 우리 집을 뼈대있는 집안으로 만들고 싶은데 어떤 교육을 시켜야 하느냐.

고현정_선생님의 책 <백가기행>을 읽어보면 “만석 이상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는 원칙을 가졌던 경주 최부잣집 이야기가 나와요. “우리는 귀(貴)는 포기하고 부(富)만 얻자. 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는 가훈으로 9대에 걸쳐 진사만 했다고요. 그런데 돈 외에 뼈대까지 원하는 오늘날 CEO들에게 어떤 조언을 해주시나요?

조용헌_뼈대는 주변 사람에게서 얻는 인심에서 나와요. 배려를 해야죠. 예컨대 이 집(명재 윤증의 집안)도 조선시대에 고소득을 올릴 수 있었던 양잠을 문중 사람들에게 금했어요. 양반이 서민의 생업을 빼앗으면 안된다는 신념이었죠. 이득을 포기하는 그런 처신에서 카리스마가 나오죠. 한국전쟁 때 이 집이 인민군 본부로 쓰여 미군이 폭격을 하려 했는데 아랫동네 출신 공군장교가 이 집은 존경 받는 집안이니 폭격하지 말라고 당부해 화를 면했답니다. 난리가 나면 이데올로기는 그저 하는 이야기이고 평소 쌓인 감정을 정리하는 기간이 되기 십상 아닙니까. 양반을 하려면 적선과 배려가 첫째입니다.

고현정_선생님 댁에 가훈이 있으신가요?

조용헌_그저 남에게 큰 폐를 끼치지 말고, 본성을 따라 한가하게 살자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학문을 해야 한다고 말하죠. 책을 보면 혼자 있을 수 있잖아요?

기도를 통해 무의식에 물어보세요

조용헌_이 자리에 나오면서 염려가 있었어요. 나는 남성적 화법에 길들여져 있어 직설을 하는데, 여배우한테 그러면 놀라지 않으려나 싶어서.

고현정_제 자신을 배우라고 부를 수나 있는지 아직 모르겠지만 배우는 상처를 좀 주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인생을 걸어야 하는 일이잖아요. 배우가 자기를 배우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구경꾼이 되니까.

조용헌_글을 써보니 알겠는데 배우도 작두 타는 직업인 것 같습디다. 방심하면 칼날에 베거든요. 수많은 사람의 관심과 인기는 반대급부도 큽니다. 낮이 가면 밤이 되는데 그림자 안에 들어갔을 때 그걸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고현정_(단호히) 감당해야죠, 선생님.

조용헌_그럴 때 내공이 필요합니다. 네 가지 정도 권할 수 있죠. 혼자 자연 속에 머무는 시간이 있어야 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어야 하고 좋은 소리나 음악을 들어야 해요. 그리고 생사의 갈림길을 돌파해본 사람들과 만나 차와 식사를 함께하세요.

고현정_아마 그런 일들이 힘들어서 제가 선생님을 뵙겠다고 용기를 냈나봐요. 구체적인 문제를 풀겠다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주위에 하도 자극적이고 단 얘기만 하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그렇지 않은 정상적인 이야기를 듣고 싶기도 했어요.

조용헌_(걸려온 전화를 간단히 끊고) 이분은 전생을 잘 보는 분입니다. 주특기가 다 달라요. (좌중 폭소)

고현정_외람된데, 주특기는 아니시겠지만 전 전생에 뭐였을까요?

조용헌_믿거나 말거나 궁궐에 있었을 것 같아요. (웃음) 사주팔자를 보니 고현정씨는 천을귀인(天乙貴人)이 두번 들어 있어 남의 도움과 인기가 따라요. 김구 선생은 천을귀인 셋이 있었죠. 복 중에 가장 좋은 복이 인연복입니다. 희로애락도 돈도 사람으로부터 오니까. 주변에 좋은 사람이 서너명 포진하면 함정을 판단해주는 강한 방패막이 되죠. 어려울 때는 생사의 문제를 절실히 고민하는 검객을 만나야 해요. 옛날에는 복숭아나무로 목검을 만들어 집안에 걸어두기도 했습니다. 모든 마귀와 단 이야기들을 끊어버린다는 의미로.

고현정_(정색하고) 그래서 제가 요새 외출을 안 하고 집을 지키고 있어요. 어차피 다 열어둔 터라 침입당한다거나 하는 생각은 안 하지만 자꾸 삿된 것들이 들어와서 쳐버려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부엌칼도 싹 정비하고 집 정리를 아주 깨끗이 했어요. 몇년 전만 해도 가위 눌리면 괴로워했는데 이젠 그냥 두기도 하고 달래기도 하고 별로 안 무서워요. 뭐, 저한테 그렇게 센 귀신들이 오시지도 않고. (좌중 폭소) 선생님, 제가 제 꾀에 빠진다는 말이 있잖아요? 다 알면서도 까불다가 허방 디딜 일이 뭐가 있을까요?

조용헌_(생각) 종교에 상관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현재 나의 절실한 물음이 뭔지 무의식에 물으면 자기의 무의식이 답해줘요. 인간의 내면에는 아메바 시절부터 수백만년 진화해오며 축적된 무수한 경험이 있거든요. 안 물으면 답이 안 나와요. 간디도 금요일은 아무도 안 만나고 혼자 있었습니다. 물레질도 생각이 복잡하니까 한 거예요. 특히 배우는 바깥의 많은 색깔에 흔들리는 직업이니 색을 닫고 내면을 쳐다봐야죠. 이제 현정씨도 마흔이니 대강은 현상의 윤곽이 짐작되지 않습니까? 마음을 다부지게 먹고 한칼에 “네 이놈!” 쳐버린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고현정_사람을 많이 만날 때 따라오는 어려움을 절실히 느끼는 중이에요.

조용헌_남을 많이 만나면 기가 소모돼 내부가 텅 비고 불안 증세가 와요. 제 판단이 옳은지 확신을 못하는데 그렇다 해서 잘 판단해줄 사람을 만나기도 쉽지 않죠. 친구들에게 토로해봤자 고공에서 내려다봐야 보이는 문제들이 있어서 상의가 소용없는 경우도 많죠. 공연히 보안만 새고.(웃음)

고현정_선생님이 글 쓰는 집으로 마련한 전남 장성의 휴휴산방(休休山房)은 지붕을 양철로 이셨던데요.

조용헌_빗소리가 좋아서요. 대학 시절 강원도에 가서 보니 화전민들의 양철지붕집이 그렇게 소박해 보이더라고요.

고현정_소박한 게 좋으신가요?

조용헌_소박하면서 누추하진 않아야 하죠. 소박과 누추는 다릅니다. 동양에서 집이란 자기를 지나치게 드러내지 않아야 해요. 자연과 어울려야 하니까. 우뚝한 콘크리트 박스는 자기를 안하무인으로 드러내는 형국이니 동양철학의 눈으로는 마땅치 않죠. <취권> 봤습니까? 눈곱 끼고 술에 절어 있는 영감이 상대 공격은 다 막잖아? 그게 동양철학입니다. 한데 상대는 나를 모르는 거죠. 늪 속의 악어가 눈만 내놓고 사방을 다 보지만 상대는 악어의 실체를 잘 못 보듯이. 그러다 햇볕 좀 쬐려고 바위 위로 올라가면 사냥꾼들이 집중사격을 하죠.

고현정_그럼 악어는 총 맞을 각오하고 나가는 건가요?

조용헌_하지만 비상구 없는 무대에 오르면 불행한 결과만 기다리고 있죠. 무대에 올라갈 때는 탈출구부터 보아두어야 해요. 여기서 무대란 인생에서 결정적 승부수를 던지는 5:5의 상황이죠.

고현정_하지만 그건 비겁한 일 아닌가요?

조용헌_아니죠.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지혜죠. 그래서 난 고 노무현 대통령이 검찰조사를 받고 세면도구 딱 준비해서 나 지금 구치소로 가겠다, 아내가 돈 좀 받았다, 사회 환원하겠다고 나갔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때는 감옥이 탈출구가 될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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