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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고 보라! 외면해선 안 될 아픈 진실을 ①
강병진 2011-09-27

실화가 소설이 되고 소설이 영화가 된 과정을 <도가니> 황동혁 감독과 원작자 공지영 작가에게 듣다

공지영 작가의 소설 <도가니>가 영화화됐다. 활자로도 감당하기 힘든 이야기를 이제 영상으로 바라보게 된 거다. <마이파더>의 황동혁 감독이 연출한 <도가니>는 영화적인 트릭을 최대한 배제한 채 원작이 전한 당시의 기억을 재현하고 있다. 감독에게 소설이 영화로 옮겨온 과정과 연출 태도에 대해 물었고, 공지영 작가를 통해 실제 사건의 속내를 들여다보았다. 애써 외면하고픈 이야기지만 성폭행이라는 사건의 성격뿐만 아니라 이야기가 담고 있는 한국의 현실이 2011년 현재와도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도가니>는 짚고 넘어가야만 하는 작품일 것이다.

왼손 새끼손가락을 편다.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갖다댄다. 남자가 여자를 강제로 폭행하고 있다는 뜻의 수화다. 영화 <도가니>는 이 간단한 수화에 담긴 끔찍한 실화에 관한 이야기다. 청각장애자들에게 가해진 성폭행 사건의 전모와 진실을 은폐하려는 움직임을 묘사한 영화는 그들의 아픔과 이를 위로하지 않는 사회에 대한 무력감을 드러내고 있다. 혹시라도 이 영화가 영화만이 할 수 있는 기적으로 피해자들의 한 맺힌 응어리를 풀어낼 거라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피해자는 당시의 기억에 몸서리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비명을 내뱉는다. <도가니>는 사건의 실체에 다가갈수록, 가쁜 숨을 몰아 쉴 수밖에 없는 이야기다.

피해자들의 악몽은 지난 2005년 11월1일 방영된 MBC <PD수첩-은폐된 진실, 특수학교 성폭력사건 고발>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사건의 장소는 어느 장애인 기숙학교다. 청각장애자인 14살의 여학생이 학교의 행정실장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학생의 증언이 공개되면서 곪을 대로 곪았던 상처들이 터져나왔다. 사회에 나간 졸업생들이 자신이 당했던 성폭력의 기억을 털어놓았다. 숨죽이고 있던 목격자들은 행정실장뿐만 아니라 몇몇 선생들이 학생들을 성폭행했거나, 하려 했다는 증언을 쏟아냈다. 교실 청소를 하고 있는 학생을 쫓아다니면서 성관계를 요구하거나, 잘못을 벌하는 대신 입을 맞추거나 학생을 집무실에 불러 성추행을 하는 등의 폭력이 자행됐다. 학생들은 학교 쪽의 대책 마련을 요구했지만 교장은 묵인했다. 성폭행을 당했다고 증언한 학생은 학교의 집요한 진술번복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가해자에 대한 고발과 구속, 직위해제가 이어졌으나, 학생들의 억울함을 달랠 만큼 제값을 치른 이는 없었다. “마지막 선고 공판의 풍경을 그린 스케치 기사에서 한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비명소리를 들은 듯했던” 소설가 공지영은 피해자들과 그들을 도운 이들의 증언을 토대로 소설 <도가니>를 써냈다. 소설이 전한 사건의 실체는 연출 제안을 받은 황동혁 감독이 “여러번 마음을 진정시키며 읽어야 할” 만큼 상상의 영역을 벗어나 있었다.

피해자인 아이들의 캐릭터 부각

이야기는 안개로 뒤덮인 산간도로에서 시작한다. 미술교사 강인호(공유)가 안개가 많은 도시 무진의 자애학원으로 향하는 길이다. 인호의 도착과 동시에 한 어린 소년이 기찻길에서 짧은 생을 마감한다. 첫 수업에서 인호는 연두(김현수), 민수(백승환), 유리(정인서)를 비롯한 아이들이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걸 직감한다. 겉으로는 점잖은 척하면서 선생이 된 도리로 학교발전기금을 내라는 교장과 행정실장도 어딘가 의심쩍다. 그러던 어느 날, 인호는 복도의 화장실에서 희미한 비명소리를 듣는다. 교장에게 성폭행을 당하던 연두의 비명이었다. 인호는 무진의 인권운동가인 유진(정유미)과 함께 사건의 전모를 파헤친다. 연두의 증언, 친구인 유리의 증언, 그리고 민수의 증언이 더해지면서 무진 교육청 선정 최우수 학원인 자애학원의 감춰진 진실이 드러난다. 교장과 행정실장, 선생이 학생들의 성별과 나이를 가리지 않고 성폭행을 해왔다는 것. 그에 대한 충격으로 민수의 동생 영수가 기찻길에서 자살에 가까운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진짜 추악한 진실은 사건이 세상이 알려진 이후부터 모습을 드러낸다. 인호와 유진, 그리고 아이들의 눈에 비친 세상은 곧 학교와 시청, 교육청, 경찰, 검찰, 교회 등등이 한데 엮여 난교를 벌이듯 나뒹구는 ‘광란의 도가니’다.

황동혁 감독은 원작을 따르는 것 외에 따로 사건의 속내를 취재하지 않았다. 소설에 담긴 사건의 흐름이 곧 실제 사건의 아픔을 드러낼 수 있는 최선의 이야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전작인 <마이파더>보다 더 정직하게 찍으려 했다. <마이파더>도 실화이지만 기본적으로 따뜻한데다 주인공의 내면 변화가 설득력을 지녀야 하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도가니>는 사건 자체의 무게가 중요한 이야기다. 자칫 실화에서 원작에 없는 다른 이야기를 찾아내는 것이 오히려 실화를 왜곡할 수 있다는 부담도 있었다.” 안개 속 도로의 풍경과 기찻길 위의 소년을 교차시키는 오프닝부터 쌍둥이인 교장과 행정실장의 얼굴, 청각장애자인 소녀가 법정에서 음악소리를 판별하는 장면 등 영화에서 돋보이는 설정의 대부분도 원작에 크게 기대고 있다. 단, 사건을 안내하는 강인호와 서유진의 사연과 역할은 원작에 비해 축소됐다. 영화 속의 강인호는 원작과 달리 과거 교편을 잡았던 시절 만난 소녀에 대한 트라우마를 지운 채 등장한다. 영화에 맞게 각색된 서유진의 과거도 편집과정에서 사라졌다. 황동혁 감독은 “중심인물들의 사연이 캐릭터의 깊이를 드러낼 수는 있지만 사건 전체의 흐름과는 다소 무관한 것 같았다”고 말했다. 두 캐릭터는 관찰자이자 조력자의 역할에 머무르게 됐지만 덕분에 공유와 정유미가 지닌 대중적인 이미지는 사건의 무게에 적절히 몸을 싣게 됐다. 무엇보다 피해자인 아이들의 캐릭터가 부각됐다. 영화에서 아이들은 성폭행을 당하는 순간의 고통뿐만 아니라, 진실이 외면받는 과정의 아픔까지 모조리 온몸으로 겪어야 하는 곳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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