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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연기라는 예술 ①
김혜리 2011-09-13

10명의 배우들이 답한다, 영화연기에 대한 8가지 궁금증

<하하하>의 문소리와 김상경

1. 배우는 인물을 어떻게 준비하는가?

당신의 직업이 영화배우라고 가정하자. 계약서에 도장이 찍히고 크랭크인 날짜도 나왔다. 향후 몇달 동안 아무개로 살라는 정언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영화도 배우도 프리 프로덕션 기간이다. 아마도 당신은 캐릭터를 메주 밟듯 분석할 수도 있고 인물이 들어올 자리를 마련해주기 위해 자아를 지우는 데에 전념할 수도 있으리라. 물론 대부분은 절충이다. 제아무리 직관에 기대는 배우라 해도 고민없이 현장에 갈 리는 만무하다. 캐릭터가 기수라면 승마를, 요리사라면 프라이팬 놀리는 자세를 익히는 건 기본이다. 그렇다고 정말 기수나 요리사가 될 필요는 없다. 관련된 장면에서 미더운 ‘흉내’를 낼 수 있는 수준으로 족하고, 실제로도 그 이상은 불가능하다.

흔히 말하듯, 배우는 타인의 삶에 어떻게 잠입하는가? 이병헌이 진하게 공감한다며 들려준 비유가 유용할 것 같다. “내 앞에서 인물이 뒷모습만 보여주며 계속 도망친다. 배우인 나는 그를 잡아서 어깨를 돌려세우고 얼굴을 보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어떤 때에는 슬쩍 뒤만 돌아보다 말기도 한다. 심지어는 끝끝내 인물의 정면을 보지 못한 채 촬영을 마치기도 한다.” 우선 역할을 치밀하게 준비하고 공부하며, 그 과정을 진심으로 즐기는 배우들이 있다. 학자처럼 진지하고 군인만큼 규율이 강한 배우 하정우도 여기에 속한다. “기존 영화의 유사 캐릭터들과 그로 분한 배우를 조사해 서너 작품으로 좁히고 살펴본다. 주변에서 비슷한 사연을 가진 사람도 찾아본다. 주제와 관련된 다큐멘터리와 자료도 수집한다. 이렇게 찾은 표본 인물들의 행동 패턴을 통해 연기 표현 방식을 모델링하는 부분도 있다.” 하정우가 분한 <멋진 하루>의 조병운이 <키드>의 채플린을, <국가대표>의 현태가 <행콕>의 윌 스미스를 참조했다는 사실은 여러 인터뷰에서 언급됐다. 마찬가지로 대학에서 배우로서 전형적인 훈련을 받은 김상경도 시나리오가 없는 홍상수 영화를 제외하면 인물의 가상 자서전을 쓰고 관련 자료를 읽는다. <화려한 휴가>를 앞두고는 망월동 묘역을 방문해 광주항쟁에서 희생된 앳된 학생의 사진을 휴대폰에 담아 수시로 들여다보며 그 이미지를 마음에 심어두었다. 취재가 작가만의 업무는 아니다. 캐릭터를 현장에서 이러쿵저러쿵 재론하기 싫어하는(“현장에선 그냥 미친 듯 달려야죠.”) 황정민은 1994년 기자로 분한 <모비딕>의 캐릭터를 구축하기 위해 현재 국장급, 부장급에 있는 언론인을 인터뷰했다. 단, 그가 취한 정보는 심리가 아니라 외적 사실들이다. 일주일에 집에 몇 번 들어갔는지, 주로 신은 신발 종류가 무엇이었는지, 마감시간에 편집국에서 담배를 피웠는지 등등의 팩트들. “태도나 행동은 개인마다 다른 거니까 물어볼 필요가 없다.”

실존/허구의 모델을 두고 캐릭터 윤곽을 잡는 법 중 오달수가 귀띔한 예가 재미있다. “배우들은 모델을 못 찾으면 동물에 많이 빗댄다. 이 사람은 토끼다, 스라소니다. <박쥐>의 경우 잡히면 죽은 척하는 너구리를 생각했다.” 동물은 심리보다 외양과 움직임에 대한 힌트일 터다. 고창석 역시 인물의 성격은 현장에서 상대 배우와 마주서기 전까지는 확정할 수 없는 부분이므로 사전준비는 의상과 외양에 집중하는 편이다. 예컨대 계급에 따라 달라지는 몸의 무게중심. <인사동 스캔들>의 쫓겨 다니는 사장을 표현하기 위해 고창석은 약간 몸을 트는 걸음걸이를 택했다. 배우들이 행하는 다양한 리서치가 모방할 본보기나 표현의 정답을 찾으려는 노력이라고만 여긴다면 좁은 이해다. 하정우는 기존 연기를 관찰할 때 명배우의 기교를 관찰할 뿐 아니라 그의 표현이 어떻게 전체 서사의 전개에 기여하고 있는지를 눈여겨본다. 나아가 김상경은 실재가 배우에게 주는 어떤 ‘기운’이 있다고 덧붙인다. 기술적 준비에 해당하는 몸 만들기 역시 육체미의 문제만이 아니다. 이병헌은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의 창이를 준비하면서, 트레이너를 두고 만든 몸이라기보다 살기 위해서 질기게 강해진 몸, 웬만해서는 쟤를 해칠 수 없겠구나 하는 느낌을 주려고 했다”고 부연한다.

그런가 하면 송강호는 인물의 전면적 구축보다 포인트를 낚아채는 유형의 배우다. “가령 인물이 노숙자라면 지저분한 행색이라든가 상식적인 몇 가지 코드가 있다. 그런데 배우는 그 코드들을 다 빼도 그를 노숙자이게 하는 본질을 찾아야 한다. 그것을 붙잡으면 관객은 노숙자의 실체를 더 깊게 받아들이게 된다. 흔히 말하는 일상성은 일상적이지 않은 단면을 통해 생생히 드러나는 거다. 호랑이를 보여준다 치자. 줄무늬 있는 전신을 그리는 것보다 고양이처럼 부드러운 털 안에 숨은 날카로운 발톱만 그려 보일 때 호랑이의 실체가 주는 공포는 커진다. 이런 것을 찾아내는 게 진정한 표현이다.”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로 존재감을 굳힌 서영희도 캐릭터 구축의 강박에서 자유로운 편이다. “내가 하는 역이면 내가 표현하는 대로 나오는 게 맞는 거라는 뻔뻔함이 생겼다. 사전에 많이 고민한다 해도 행동에 대한 합리화밖에 되지 않을 경우가 많았다.” 그런가 하면 임수정이 캐릭터에 다가가는 1단계는, 인물을 파고들기보다 물러서는 것이다. 감독 혹은 관객의 눈이 되어 머릿속으로 혼자만의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찍어보는 놀이. “마치 감독이 된 것처럼 나름대로 시나리오를 영상화해서 상상한다. 혼자 극장에 앉아 아직 찍히지 않은 영화를 보듯.”

역발상의 질문을 던져보자. 배우는 반드시 인물을 완벽하게 이해해야 할까? 배우와 감독이 인물상을 정확히 공유하는 것이 꼭 최선의 결과로 이어질까? 연극이나 드라마의 경우 답은 당연히 “그렇다”일 것 같다. 하지만 보다 우연에 열려 있는 영화는 다르지 않을까? 이 의문을 품게 만든 배우는 전도연이다. 그녀는 <해피엔드> <밀양> <하녀> 관련 인터뷰에서 본인이 표현하는 여자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토로해놓고 매번 훌륭한 결과를 냈다. 전도연이 답한다. “영화를 시작할 무렵엔 인물을, 감독의 머릿속을 다 알고 들어가야 할 것 같았지만 차차 어리석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현장에서 연기하면서 인물의 ‘상황들’을 겪다 보면 ‘아, 그럴 수도 있지’란 생각이 생긴다.” 말하자면, 살아보니 알겠는거다.

<멋진 하루>의 전도연과 하정우

2. 현장에 선 배우의 머릿속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오죽하면 ‘빙의’라는 오컬트적 단어가 동원될까. 우리는 허락된다면 그들에게 뇌파 탐지기라도 부착하고 싶다. 연기에 돌입한 배우의 의식 안에서는 과연 어떤 작용이 일어나는가? 어떤 계기가 감정의 방아쇠를 당기고 밸브를 잠그는가? 영화 연기도 연습이 가능한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사례 수집뿐이다. 송강호는 이완된 정신과 육체를 유지한 채 현장에 가는 일을 기본으로 꼽는다. 서영희의 경험담도 맥락을 같이한다. “집에서 정말 열심히 연습하고 온갖 상황에 대응하는 많은 콘티를 짜보고 현장에 가면 머릿속에 그린 테이블은 있지도 않고 지하로 상상했던 공간은 옥상이다. 거기서 내가 ‘이건 아닌데’ 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면 한없이 무너진다.” 영화 촬영현장에서 스탭과 차별되는 배우의 특수한 상황은 그를 제외한 전원이 현장이 제대로 굴러가게 하기 위해서 극히 냉철한 머리를 유지하고 있는 와중에 혼자 정신적으로 벌거벗어야 한다는 점이다. <밀양>에 대한 전도연의 회상이다. “취한 사람들 속에서 정신 나간 연기를 하는 게 아니라 칼 같은 시선들이 나를 둘러싼 가운데 자신을 놓기는 매우 힘들다. 큰 수치심을 버려야 했다. 남들은 신이 들린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얼마나 비워내느냐가 관건이다.”

황정민의 경우 “테스트 촬영을 하러 가서 인물의 의상을 탁 입는 순간 귀 뒤가 삭 달아오르는 느낌”에 스위치가 켜진다. 촬영 중 캐릭터의 성격을 유지하기 위해 다양한 수준의 몰입이 시도된다. <너는 내 운명>에서 황정민과 공연한 전도연은 “석중이가 은하랑 떨어져 만나지 못하는 대목을 찍은 시기에는 촬영하지 않는 동안에도 나를 피했다”고 기억한다. <멋진 하루>에서 유유자적한 남자 조병운이 돼야 했던 하정우는 실제 촬영현장에서 한번도 짜증이나 화를 내지 않겠다는 결심을 했다. ‘쿠션’ 좋은 병운의 성격을 유지하려는 마음가짐이었다. 반대로 영화 내내 분노로 지탱하는 <악마를 보았다>의 이병헌의 얼굴은 줄곧 밤새 울고 난 남자의 그것이었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일단 촬영장에 도착하면 분장할 때부터 오늘 찍을 장면만 생각한다. 그러다보면 나는 어느새 분노하고 있고 상실감에 잠긴다. 이상하게 그런 감정이 오면 나는 눈 아래가 차오르는, 팽창하는 느낌을 받는다.” 김상경은 <화려한 휴가>에서 부상당한 동생이 죽는 병원 장면을 찍는 날, 조명과 세팅을 바꾸는 사이에도 오열을 멈추지 않고 촬영하다 숙소로 가는 차 안에서 기진해 기절하기도 했다. 반면 줄기찬 몰입보다 ‘출입’을 선호하는 배우도 있다. <추격자>의 희생자와 드라마 <며느리 전성시대>의 어리벙벙한 작가 역을 같은 시기 병행한 서영희는 고통으로 울부짖는 연기와 웃고 떠드는 연기를 왕복함으로써 부족한 에너지를 보완하고 정신적 평형을 지킬 수 있었다고 자평한다. 뭐니뭐니해도 배우에게 현장은 프리 프로덕션부터 진행된 캐릭터 형성의 메인 그라운드다. “감독과 책상에 마주앉아 이야기하거나 리딩만으로는 인물을 파악하는 데에 한계가 있다. 그녀의 옷을 입고 극중 장소에서 리허설을 할 때에야 비로소 드러나는 디테일이 있으니까.” 전도연의 소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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