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미스터 모노레일>이라는 장편소설을 발간하고, 독자와의 만남 행사에 가게 됐다. 그냥 가서 만나기만 하면 되는 건데, 어쩐지 어색하고, 내 책을 본 사람들을 만나는 게 뻘쭘하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문학 얘기 하게 될까봐 민망해서 뭔가 준비를 하기로 했다. 뭐가 좋을까, 뭐가 좋을까, 생각하다가 특별한 파일을 만들어보고 싶어 사람들의 목소리를 녹음하기 시작했다. 소설의 문장들을 여러 사람이 읽은 다음 그걸 하나로 합치는 거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얼마나 다른지, 서로 다른 목소리가 얼마나 매력적인지 들려주고 싶었다.
15일 동안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녹음을 부탁했다. 모두 흔쾌히 응해주었다. 재미있어했고, 신나게 녹음해주었다. 모두에게 정말 감사하다. 녹음을 끝마친 뒤 편집을 하려고 컴퓨터 앞에 앉았는데, 이렇게 당황스러울 데가 있나. 몇 개의 목소리 주인을 모르겠는 거다. 아무리 들어봐도 사람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다(흘러나오는 음악에다 스마트폰을 갖다 대면 가수와 곡목을 찾아주는 앱이 있듯 흘러나오는 목소리에다 스마트폰을 갖다 대면 누구의 목소리인지 찾아주는 앱이 있으면 좋겠다). 결국 녹음 순서와 나의 동선을 차근차근 되짚어본 뒤에야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아냈지만 미안한 마음은 가실 줄 몰랐다.
목소리에도 낯이 있구나. 내가 알아듣지 못한 목소리는 처음 만나서 녹음을 부탁한 사람들의 목소리였다. 익숙하지 않은 소리여서 알아채지 못한 것이었다. 녹음할 때는 참 듣기 좋은 목소리라고 생각했고, 특별한 목소리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리 좋은 목소리여도 내가 친숙하지 않으면 기억하기 힘든 목소리였다.
롤링 스톤스보다 비틀스
편집을 하는 과정에서 목소리를 찬찬히 들어보다가 또 하나 발견한 게 있다. 모든 목소리는 두 가지 중 하나였다. 자신감 있는 목소리이거나 자신감 없는 목소리이거나. 자신감 있는 목소리는 아나운서, 성우, 가수들처럼 자신이 어떤 목소리를 내는지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자신의 목소리가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고, 자신의 목소리에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몇몇 뮤지션들에게 “카페 같은 곳에서 자신의 노래가 나오면 기분이 어때요?”라고 물어보았더니 대부분 “뭐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냥 내 노래가 나오는가보다, 생각하는데요”라고 대답하더라. 그만큼 자신의 목소리를 객관적으로 듣는 연습을 한 거겠지.
녹음에 익숙하지 않거나 자신의 목소리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감 없는 목소리를 낸다. 자신의 목소리가 얼마나 이상하게 녹음될지 알기 때문이다(실은 이상하게 녹음되는 게 아닌데). 녹음기에서 흘러나오는, 내 것이 아닌 것 같은 목소리를 한번쯤은 들어봤을 테니까, 녹음하기 전부터 이미 겁을 먹는 거다. 이런 걸 낯가림이 심한 목소리라고 해야 하나.
두 종류의 목소리에는 서로 다른 매력이 있었다. 자신만만한 목소리에는 여유로운 매력이 있었고, 낯가림이 심한 목소리에는 조심스럽고 수줍은 매력이 있었다. 편집을 해보니 어떤 목소리가 더 낫다고 말하기 힘들었다. 여유로운 목소리만 계속 이어지니까 어쩐지 심심하고, 낯가림 심한 목소리만 붙여놓으면 불안해서 들을 수가 없다. 두 종류의 목소리가 잘 섞여야 듣기에 편했다. 목소리가 얼마나 그 사람을 잘 드러내는지 새삼 깨달았다.
음악을 고를 때 목소리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다들 그런가? 나만 그런가?). 아무리 멋진 음악을 하는 그룹이더라도 리드보컬의 목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쩐지 정이 가지 않는다. 고백하건대 남들 다 좋다는 퀸의 음악을 단 한번도 좋아해본 적이 없으며(그러니까 어떤 목소리를 좋아하는지는 순전히 취향의 영역이다), 목소리를 날카롭게 다듬는 헤비메탈의 늪에서는 비교적 빨리 밧줄을 잡고 빠져 나왔으며, 그룹 일스(Eels)나 닐 영의 음악은 완성도가 들쑥날쑥임에도 불구하고 앨범을 발표할 때마다 늘 챙겨 듣게 된다. 이게 다 목소리 취향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보컬은 대부분 ‘무심한 목소리’들이다. 이게 참 설명하기가 쉽지 않은데, 감정이 없다기보다는 옳고 그른 것이나 좋고 나쁜 것에 경계를 두지 않는 목소리라고 해야 할까, 자신의 감정을 애써 설명하려고 하기보다는 그냥 던져두고 멀리서 바라보는 목소리라고 해야 할까. 도무지 설명하기 힘들지만(게다가 이런 비교가 위험하고 가끔 기준이 오락가락하긴 하지만) 롤링 스톤스보다 비틀스를 더 좋아하고, 재니스 조플린보다 니코를 더 좋아하는 것도 다 이런 취향 때문이 아닐까 싶다.
목소리 음원 공개는 실패했지만
요즘 <슈퍼스타 K3>를 시청하면서 목소리 취향을 새삼 느끼고 있다. <나는 가수다> 같은 프로페셔널들의 무대가 아니라 아마추어들의 무대라는 점 때문에 더 흥미롭다. 자신만의 스타일이 생기기 이전이니 차이가 더욱 뚜렷하다. 노래를 자신의 목소리로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어떤 목소리로 노래를 부를 것인가가 다 다르다. 낯가림 심했던 목소리들이 세상 밖으로 막 터져 나오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아 흥미롭고, 노래에 담긴 세상을 어떻게 묘사하고 싶어 하는지 알 수 있어 흥미롭다. 글 쓰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해석해야 하고 묘사해야 하고 표현해야 한다. 노래를 정말 잘하는 사람을 보는 것도 좋지만 나는 도전자들의 차이를 보는 게 재미있었다(글을 쓰고 있는 아직까지는 8월26일에 방송됐던 뉴욕의 듀엣 ‘투개월’이 가장 내 취향이었다. 그들이 어떻게 변할지는 모르겠지만, 세상에, 자미로콰이를 그토록 무심하게 부르는 모습이라니…).
목소리를 내고, 목소리를 듣는 과정은 참 의미심장하다. 나는 정확한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 내 목소리를 가장 잘 아는 것은 상대방이다. 하지만 상대방이 듣는 내 목소리를 정확한 내 목소리라고 보기도 힘들다. 그 소리 역시 공기 중에서 왜곡된 것이니까. 진짜(라는 게 있다면) 목소리는 내가 내는 목소리와 상대방이 듣는 목소리 그 사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우리가 세상을 사는 방식 역시 비슷하다. 내가 생각하는 나와 상대방이 생각하는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진짜 나는 어디쯤 있을까. 내가 생각하는 나에 가까울까, 아니면 상대방이 생각하는 나에 가까울까. 어쩌면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그 차이를 좁혀나가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상상초월 쇼케이스>를 진행하면서 얻는 가장 큰 즐거움은 그들의 목소리를 가까이서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다는 점이다. 뮤지션들이 노래와 세상을 해석하는 목소리를 가까이서 듣다 보면 깜짝 놀랄 때가 많다. 한 줄의 시구가 뒤통수를 내려치듯 그들은 목소리로 온몸에 전율을 일으킨다.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한지 불가사의할 때가 많다. 9월 쇼케이스의 주인공은 이아립과 이호석의 밴드 ‘하와이’인데, 이아립은 예전 스웨터 시절 내 귀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던 목소리의 주인공이다. 이런 목소리도 가능하구나 싶었던 목소리다. 이아립의 목소리를 가까이서 듣는 것만으로 즐거울 것 같다.
15일 동안 27명의 목소리를 담은 내 비장의 음원 공개는 실패로 돌아갔다. 편집이 엉망이었다. 27개의 목소리를 조각조각 나눠서 이어 붙이는 건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다. 15일 동안 녹음했건만 재생시간은 겨우 2분밖에 되지 않아 허망했으나 그래도 목소리를 듣고 목소리를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다음엔 한 100명 녹음에 도전해볼까 싶다. 아, 소설가 친구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린다. “도대체 정체가 뭐냐? 너는 행사하려고 소설책을 내는 거냐?” 아니지, 그건 아닌데, 그래도 뭔가 하나씩 배워나가면 좋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