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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주의자 김훈과 영화주의자 홍상수

<북촌방향>

예컨대 그들의 대구란 이런 것이다. 김훈의 <칼의 노래>의 이순신이 김훈의 말처럼 “리얼리스트”일 때 홍상수의 <하하하>의 이순신은 세상은 있는 그대로 보는 거냐는 한 남자의 질문에 “아니지,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게 아니지. 그런 게 어디 있냐? 생각을 해봐”라고 말한다. 김훈이 <칼의 노래>에서 ‘꽃은’과 ‘꽃이’ 사이에서 무엇이 더 옳은가 고뇌할 때 홍상수는 <하하하>에서 ‘꽃은’ 이건 ‘꽃이’이건 심지어는 꽃이라 불리건 그 무엇이라 불리건 “내가 사랑하는 거지요. 꽃을”이라고 한 여인이 자신의 느낌에 당당하도록 만든다. 김훈이 “시간은 인간쪽으로 눈길 한번 주지 않는다. 인간은 시간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이 소외는 대책이 없는 소외다”라고 시간 속 인간사의 ‘속수무책’을 감별하여 말할 때 홍상수는 “<북촌방향>은 시간적으로 이어지는 하루들인 것처럼 보이면서도 어떻게 보면 서로 상관없는 ‘첫날’ 같은 그런 하루들”이라며 시간 속 인간사의 ‘각양각색’에 유연하다. 김훈이라는 ‘사실에 바탕한 주관’과 홍상수라는 ‘주관이 껴안고 있는 사실’. 인간의 무수한 무능함을 인정해야 삶의 실체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김훈에게는 삶의 많은 것이 엄중하고, 인간의 익숙해 보이는 모양새를 호기심으로 다시 쳐다보아야만 삶의 실체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홍상수에게는 삶의 많은 것이 귀엽다. 그래서 김훈은 가장 확실한 사실들을 받아들이는 데 필사적이고 홍상수는 확실하다고 말해지는 그 사실들의 틈을 벌리는 데 필사적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김훈의 윤리는 언어로서의 인정이고 홍상수의 윤리는 이미지로서의 차이다.

김훈의 문학을 존경하는 나는 그러나 홍상수의 영화에 어쩔 수 없이 기운다. 홍상수적 인간과 삶이란 결국 “영화의 일상적 인간”(장 루이 셰페르)과 삶에 밀접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종종 사실에 바탕한 언어로 도무지 해명되지 않는 그 무엇들을 위해 존재할 때, 오로지 그렇게 존재할 때만 가장 영화적이기 때문이다. 위대한 영화주의자 홍상수가 그 강력한 지향을 지니고 있다. 그의 영화 <북촌방향>을 보았을 때 문득 한 위대한 언어주의자 김훈이 대구로 떠오른 것도 그런 이유인 것 같다. 그렇다면 사실에 입각한 언어로 잡히지 않는 영화적 대상들 중에는 무엇이 있는가. 그것들을 다는 모르겠고 얼마나 있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김훈은 이런 말을 했다. “시간의 흐름, 시간의 작용 이런 것들은 우리가 언어로 포착하기가 거의 불가능하거나 매우 힘든 것입니다.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것보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언어로 잡히지 않는 그 시간의 흐름이나 작용이 때로 영화에 의해서는 포착될 수 있다고 나는 지금 덧붙이고 싶다.

물론이지만 영화로 표현할 수 있는 것보다 영화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훨씬 더 많다는 것 또한 말해야 할 것이다. 예컨대 영화는 문학이 인간의 내면에 관해 기술해 놓은 저 섬세함에 끝내 이를 수 없을 것이다. 그 누가 <칼의 노래>를 영화로 만든다 해도 원작이 성취한 그 깊은 내면성의 표현에 버금가는 작품이 나올 수 있을 거라고 나는 기대하기 어렵다. 제임스 조이스의 의식의 흐름 기법이 영화에 적합하다고 판단하여 내적 독백의 지적 몽타주라 부르며 최종적으로 그것을 담아내기를 염원했던 야심가 에이젠슈테인. 과문한 내 생각에 그는 최종목적의 달성에 실패했다. 영화란 시각과 청각이 이루는 표면이고 그것에의 작동으로 한계와 가능성 그 둘 다를 지닌다. 그 때문인지 영화의 불편함과 부족함에 관하여 오히려 역으로 해석한 뒤 그걸 영화의 특권이라 말하는 이도 있다. 하스미 시게히코가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를 유희하며 그렇게 주장했다. 그리고 홍상수는 자신의 영화가 중립적 표면 위에서 작동한다고 늘 말해왔다. 그러니 한계이건 특권이건 간에 영화의 존재의 기반이 그러하다면 그 상태에서 영화가 다룰 수 있는 몇 가지가 있고, 다시 말하지만 그 중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시간이다. 물론이다. 영화도 시간의 비밀을 풀어내지는 못할 것이다. 지상의 무엇이 그걸 할 수 있을 것인가. 다만 영화가 종종 시간을 흔들어댈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북촌방향>이 놀라운 방식으로 그걸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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