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사의 문화유산 중 상당수가 유일한 창작자의 손에서 나왔다면 아마 깜짝 놀라고 말 것이다. 하지만 사실이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시공을 초월해 다채로운 양식을 쏟아낸 그 위대한 예술가의 이름은 ‘어나니머스’(무명씨). 15세기 전후 완성된 시각 이미지를 주로 모아놓은 박물관들의 소장품 중 다수는 바로 이 신원미상 무명씨의 작품. 세계 도처에 미공개된 예술품까지 죄다 꼽으면 인류 문화유산 거의 전부는 무명씨의 노고에 의존하리! 미술, 음악, 문학 전 분야에서 무명씨의 활약상은 고르게 관찰된다. 하지만 이 세기를 대표하는 예술가를 기리는 예술의 전당이 별도로 존재하진 않는다. 무명씨란 시공 속에 산재된 이름없는 예술 창작자의 노고를 기리는 부득이한 오마주의 표지인 것.
무명씨의 공로가 지대하지만, 독창적 스타일을 연달아 내놓은 무명씨가 많은 것 같진 않다. 만일 그랬다면 그에겐 어떤 ‘이름’이 붙었을 거다. 통상 무명씨는 거장의 스타일을 표절하는 아류거나 미숙한 기량에서 출발하기 일쑤다. 예술품 상당수가 후대에 무명씨로 통합 관리된 속내는 세월에 씻겨 작가 이름이 유실되었거나 공동 작업의 명분 속에 개인의 기여도를 세세히 기록하는 전통이 없던 시대적 산물일 것이다.
그렇지만 정체불명에도 장단이 따른다. 신원 비밀의 장막 뒤에 숨어 완벽에 가까운 표현의 자유를 보장받곤 한다. 화장실 벽에 남긴 음란한 그림에 제 신원을 밝히는 낙서가는 없다. 하지만 개인의 정체성이 이름으로 확인되는 오랜 전통 때문에, 무명씨란 서명은 신뢰감을 떨어뜨리고 제작자에 대한 흥미 유발을 견인하지 못한다. 고유한 코드 아래로 작품들이 수렴되고 범주화될 때 비로소 작품과 이름을 나란히 주목하는 게 대중이다. 제품의 상호를 작명할 때마저 사전 마케팅 조사로 소비자 반응을 살피지 않나. 이름을 매개로 창작자와 감상자가 연결되니 이름은 심히 중차대하다. 그럼 보장된 신원 비밀로 표현의 자유를 맘껏 누리되 고유한 작가 정체성도 확보한 경우는 없을까? 예명에 의존해 신비감을 키운 극소수의 반체제 예술가가 있다. 근자의 대표 사례는 영국 낙서화가 뱅크시다. 신상이 홀라당 털리는 매스미디어 시대에 여전히 가면 뒤로 얼굴과 실명을 숨긴 채 창작을 이어가는 것 자체가 우월한 예술이다.
전근대기의 셀 수 없는 무명씨 예술가의 질박한 결과물과 예명으로 정체성을 유지한 월등한 예술가 뱅크시의 예외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무명씨의 가치는 오늘날 더 빛난다. “모든 사람이 예술가다”라고 선포한 요셉 보이스의 유명한 경구를 계승했다는 위키백과의 성과란 신원미상의 오만 무명씨가 쌓아 올린 고급 정보더미로 정리된다. 위키리크스의 성공적 계승자 중 하나로 <CNN>이 보도한 불복종운동의 대표적 선도그룹 ‘무명씨’(Anonymous)는 코스프레처럼 브이 포 벤데타 가면을 쓰고 정부 정책에 집단 저항한다. 이름을 가린 정체불명 개인의 집합체가 이름을 지닌 거대 공식 기구에 맞서는 형국이다. 문화예술을 포함한 인류사의 발전은 늘 그런 식으로 추진되곤 했다.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예술가 무명씨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