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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 서키스] 그에게 오스카를 수여하라
주성철 2011-09-01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의 앤디 서키스

제아무리 일생일대의 명연기를 펼친다 해도 절대 오스카 트로피를 거머쥐는 일 따위 허락되지 않은 사람. 앤디 서키스는 아마도 영화 역사상 가장 ‘낮은 데로 임하는’ 배우일 것이다. ‘디지털 배우’의 등장이 과거 토키영화의 등장만큼이나 혁명적인 일이라면 앤디 서키스는 그 첫머리에 놓여야 할 인물이다. 이처럼 따로 소개를 하고 얼굴을 공개하지 않는다면 과연 그 누가 그의 존재를 알아챌까. ‘모션캡처 연기의 달인’이라는 칭호는 거창하기만 할 뿐 그의 감춰진 존재감을 드러내기엔 역부족이다. 사악함을 감춘 주눅든 눈빛과 앙상한 몸, 그리고 구부정한 허리의 골룸이 없는 <반지의 제왕>을 상상할 수 있을까, 킹콩 역할을 위해 르완다까지 가서 고릴라의 행동양식과 습성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체득한 그의 열정은 또 어떤가. 그리고 서늘한 표정만으로도 인간을 압도하는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이하 <혹성탈출>)의 ‘시저’의 ‘미친 존재감’은 단연 올해 여러 시상식의 연기상을 휩쓸고도 남을 만한 위엄으로 넘친다.

이 남자의 이중생활

1964년생인 앤디 서키스는 마이클 케인, 숀 코너리, 앤서니 홉킨스, 이완 맥그리거, 주드 로처럼 이른바 ‘영국 출신’ 배우다. 말하자면 연기에 관한 한 영국의 ‘명품’ 배우들을 끊임없이 수혈해온 할리우드에서 모션캡처, 혹은 얼굴에까지 마커를 붙여 미세한 표정 연기까지 담아내게 된 퍼포먼스캡처 연기에 이르기까지 영국 배우의 숨결이 깊이 스며든 것이다. 실제로 그는 <리어왕> <올리버 트위스트> 등 셰익스피어 극 전문 배우로 활약해온 ‘정통’ 배우다. 그러다 <반지의 제왕> 시리즈에서 절대반지에 대한 야욕을 끝까지 버리지 못하던 골룸으로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후 피터 잭슨과의 인연은 계속돼 <킹콩>에도 참여, 킹콩 캐릭터의 모션캡처 연기는 물론 영화 속 탐험선의 요리사 럼피를 동시에 연기했다. 그럴 때마다 그의 고충은 단 하나였다. “골룸 목소리 연기 너무 좋았어요”라거나 “<킹콩>에 요리사로 나오셨죠? 실제 모습으로 나오신 모습도 괜찮았어요”라는 평가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모션캡처나 퍼포먼스캡처 연기에 대해 ‘애니메이션에서의 목소리 연기’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고, 실제 모습 그대로 출연할 때의 낯선 인상을 숨기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두 모습 다 인정받고 싶어 한다. 퍼포먼스캡처 연기 캐릭터로도 오스카를 받아야 하고 실제 모습으로도 대중의 사랑을 받고 싶다. 배우로서 그러한 욕심은 당연한 것이다.

실제로 그는 할리우드에서 골룸이나 킹콩으로 활동할 때도 영국에서는 수많은 정극 영화에 출연하며 철저한 이중생활을 해왔다. 제이미 벨 주연의 <데스워치>나 마이클 윈터보텀의 <24시간 파티하는 사람들> 외에도 불법 감금과 고문 문제 등을 다룬 <특별한 귀환>(Extraordinary Rendition)에서 이유도 없이 체포, 감금된 남자를 심문하는 남자로 나와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고, 묘한 B급 정서로 가득 찬 <오두막>(The Cottage)에서는 돈을 뜯어내기 위해 마피아 보스의 딸을 납치하는 남자로 나왔다. 물론 할리우드에서도 그런 실제 모습으로 여러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반지의 제왕> 시리즈를 끝내고 출연한 <완벽한 그녀에게 딱 한 가지 없는 것>에서는 뉴욕의 말끔한 패션잡지 편집장으로 나와 마이클 잭슨의 문워크를 익살스레 소화했고, <킹콩> 이후 출연한 <프레스티지>에서는 단정한 고전 의상을 차려입고 나와 쇼맨십 뛰어난 마술사 앤지어(휴 잭맨)에게 마술 기계를 제공하는 앨리 역으로 출연했으며, 한동안 영국으로 건너가 지내다 출연한 <잉크하트: 어둠의 부활>에서는 삭발한 머리에 검은색 정장 차림으로 어둠의 제왕 카프리콘으로 등장했다.

내면의 영혼을 연기하다

아마도 <혹성탈출>은 퍼포먼스캡처 연기에 있어 앤디 서키스 최고의 성과로 남을 것 같다. 골룸이나 킹콩에 비하면 시저는 인간 그 이상의 존재다. 그래서 그는 1970년대에 인간 침팬지, 즉 ‘휴맨지’라 불린 올리버라는 침팬지를 참고했다. 올리버는 자신을 인간이라고 생각해 다른 침팬지들과 어울리지 않았다고 하는데 <혹성탈출>의 시저 역시 어떤 면에서 그러하다. 영장류 보호소에 들어간 뒤 기존 침팬지들의 우두머리와 거대한 고릴라, 그리고 수화가 가능한 오랑우탄 등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머리’를 썼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고대 로마의 종신 독재관 ‘줄리우스 시저’에서 따온 이름부터 그렇지 아니한가.

희로애락을 오가는 다양한 표정과 리더로서의 카리스마 등 그는 시저를 연기하며 여느 실사 배우들 못지않은 연기력을 뽐냈다. 자신을 애지중지 아껴준 할아버지(존 리스고)를 위해 싸울 때, 듬직한 동료였던 고릴라가 죽어갈 때 보여준 우정의 눈물 등 “퍼포먼스캡처는 모든 배우들이 행하는 ‘메이크업’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해온 그에게 시저는 실제 모습으로나 디지털 캐릭터로서나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어떤 정점이다. 오히려 그는 퍼포먼스캡처가 ‘내면의 영혼을 표현하는 보다 고차원의 연기’ 유형이라고도 생각하는 것 같다. <반지의 제왕> <킹콩> <아바타> 등을 작업한 웨타디지털의 시각효과 감독 조 레터리는 그에 대해 “시각효과 기술의 잠재력을 완전히 이해하고 포용할 줄 아는 거의 유일한 배우다. 어떤 배우들은 영화의 사실성과 자신들의 연기가 동떨어져 있다는 생각에 퍼포먼스캡처를 두려워하지만, 앤디는 숨결 하나하나와 미세한 근육의 움직임을 포함해 자신이 카메라에 보여주는 미묘한 모습이 전부 시각적으로 설명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일까, 앤디 서키스는 내년쯤 런던에 캡처 연기 전문 스튜디오 ‘The Imaginarium’을 오픈할 예정이다. 퍼포먼스캡처 연기를 해야 할 배우들의 수요가 앞으로 더욱 늘어날 것이라 감안하면, 이처럼 연기 지망생들에게 모션캡처를 연구하고 경험하고 개발할 수 있는 공간과 프로그램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모션캡처 연기의 원조이자 달인인 그가 아니면 생각할 수 없는 탁월한 아이디어다. 실제로 그 아이디어는 영화산업의 비껴갈 수 없는 현실이 됐다. <혹성탈출>은 블루스크린 앞에서 특수의상을 입고 촬영하는 기존 방식에서 벗어나 적외선으로 감응이 가능한 LED를 이용한 시스템을 도입하면서, 실제 세트장에서는 물론이고 스튜디오 밖 현장에서도 실사 연기자들과 함께 촬영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게다가 헤드기어에 달린 초소형 카메라로 앤디 서키스의 얼굴 근육과 눈동자 등 미세한 움직임까지 포착해 반영할 수 있었으니, 디지털 배우와 실사 배우의 경계는 더욱 희미해졌다. 이쯤에서 또 한번 많은 사람들이 그의 오스카 후보 지명을 바랄 것이다. 오스카 위원님들, 듣고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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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이십세기 폭스코리아